평범함을 거쳐야 특별해질까?
얼마 전 지인 A의 결혼을 계기로 선릉역 인근 모처에서 ‘관련 인사’들과 모임을 가졌다. 늘 그렇듯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한 번에 모이기란 쉽지 않다. 결혼식이 10월이라 아직 시간이 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이렇게 약속해서 모이지 않으면 또 몇 년 후에나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A는 거의 2주 전부터 ‘프로젝트 단톡방’을 만들어 공지를 올렸다. 3명만 되어도 모두의 ‘교집합’을 찾기가 어려운데 그날 운이 좋게도 단톡방에 초대받은 5명이 모두 참석했다.
우리는 지난날 대학 고시반에서 함께 시험을 준비하던 사이였다. 한쪽 귀퉁이의 커다란 에어컨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며 칸막이 책상에 빽빽히 꽂힌 각자의 수험서에 묻혀 하루하루를 보냈다. 브아걸의 ‘Hold the Line’과 백지영의 ‘사랑 안해’를 들으며 공부에 지친 맘을 달랬고 독일 월드컵에서의 사상 첫 원정 승리를 생중계로 목격하며 환호했었던 2006년의 바로 그 여름이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개인별로는 간간이 만났지만 이렇게 여러 명이 모인 것은 그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대체로 서로 6~7년만에 얼굴을 본 사이라 ‘근황 토크’부터 시작했다(사실 말이 근황이지 서로가 어떻게 사는지도 몰랐으니).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서로의 ‘약력’(?)을 보고했고 ‘Q&A’가 이어졌다. 공부하던 당시의 의도대로 진로를 선택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지만(사실 시험에 떨어져서) 다들 오히려 더 행복하고 재미있게 그리고 심지어 풍요롭게 살고 있었다. 새삼 인생에서 계획보단 대처가 더 중요하단 말이 와닿더라는~~
5명이 돌아가며 했던 개인 토크가 끝났다. 흔히 그렇듯 이런 단체 모임에서 대화의 끝은 특정한 주제로 향하게 마련인데, 바로 그 자리에 나온 미혼 남녀에 대한 컨설팅이나 상담을 가장한 ‘분석’이다. 미혼은 나 혼자밖에 없었던 관계로 난 표적 아닌 표적이 되었다. 아예 그런 경우가 없진 않지만 대부분 선을 넘는 발언들은 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현황’을 대화의 소재로 기꺼이 제공하는 편이다. 잘만 하면 나 하나의 ‘희생(헌신?)’으로 여러 사람들이 즐겁고 유쾌해지는 경우도 많다.
다만 모든 대화가 그렇듯이 서로의 의견차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 날 역시 나와 4인의 패널- 결국 이런 포지션의 배치가 이루어졌다-간의 확연한 입장 차이를 보인 대목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앞으로 여성을 만날 때 만남의 목적에 대해 정확한 입장을 취하느냐의 여부였다.
패널 : 앞으로 여자를 만날 때 연애인지 결혼인지 목적을 확실히 정해야 돼.
나 : 아니 사람을 만나는데 그런 목적을 어떻게 정해요? 차차 알아가며 연애부터 하다가 결혼할 수도 있지.
패널 : 그러기엔 니가(형이, 오빠가) 나이가 너무 많아. 시간이 없어요.
물론 그들의 입장을 비난하거나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전략’을 택한 결과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 잘 살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내 나이에 많은 만남의 기회를 얻기 어렵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리고 고압적인 권고보다는 진심어린 충언의 ‘스멜’이 더 강했기에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보통의 사이’를 만드는 것이 그야말로 몽상이며 ‘억겁의 세월’이 필요한 작업인지에 대해서는 좀 다른 견해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남녀의 관계를 진전시킴에 있어 정말 필요한 것은 물리적인 시간의 총량보다는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밀도이다. 누군가 말했듯 시간을 ‘압축’해서 자주 만난다면 한 두 달 안에도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를 파악하기 위한 충분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나이가 찼다 해도 이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까지 ‘스킵’할 수는 없다는 게 나의 입장인데, 그날의 패널들은 내 나이엔 그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난 그저 ‘정공법’을 말했을 뿐인데~~
하지만 타인, 특히 어떤 길을 먼저 걸어간 누군가의 의견은 최소한 참고로서라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그날 패널들의 소중한 조언은 ‘사람을 만날 때 내 마음을 분명하고도 진실되게 표현하라’는 의미로 ‘통역’할 예정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정제된 태도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글쓰기 전 깨끗하게 비워진 브런치의 이 화면처럼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으려 한다. 서로 간의 호감을 확인한 후 진실되고 분명한 태도로 신속히 ‘진도’를 나간다면 결과에 이르는 데 많은 시간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그게 기쁨일지 아쉬움일지는 모르지만). 고속으로 달려 이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으면서도 훌륭한 연비를 기록하는 운전은 자동차가 아닌 내 마음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