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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Sep 22. 2020

씨름이 남긴 불멸의 유산

‘천하장사’에 담긴 인생의 철학

 1980년대는 현재까지도 흥행 중인 상당수 스포츠의 리그가 출범했던 시기였다. 비록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독재 정권이 국민의 저항 정신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면이 없진 않았지만, 해당 종목의 입장에선 중흥기를 맞이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1982년의 프로야구를 필두로 프로축구, 프로씨름 등이 연이어 첫 발을 내디뎠고 농구와 배구에서도 각각 농구대잔치와 백구의 대제전(슈퍼리그)의 형식으로 실업 리그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처럼 놀거리와 볼거리가 다양하지 않았고 해외와의 교류도 제한적이었기에, 스포츠의 의미가 유달리 각별했던 시절이었다.

 

 이 중 씨름은 과거와 비해 가장 그 위상이 쇠퇴한 종목이다. 하지만 1980년대의 씨름의 인기는 여느 구기 종목 못지 않았고 이만기를 필두로 이준희, 이승삼, 홍현욱, 이봉걸 등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출중한 기량을 자랑했다. 체급별 최강전 및 천하장사 대회는 공중파에서 중계되었고(당시에는 스포츠 채널이란 개념이 없었다), 우승자들이 받은 스포트라이트는 연예계 최고 스타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최고의 메인 이벤트 개최 시에만 입성이 허락되었던 실내 종목의 ‘성지’ 장충체육관의 문턱조차 씨름에겐 그리 높지 않았고, 대회가 개최될 때마다 관중석이 매진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의 사랑의 테마가 해당 작품을 영원히 기억되도록 만드는 것처럼, 스포츠의 주제곡이나 응원가 역시 해당 종목의 인기를 더욱 끌어올리고 훗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다. 1986년 발표된 김연자의 ‘천하장사’는 그토록 화려한  씨름의 전성기를 빛냈던 ‘공식 OST’였다. 요즘 세대들에겐 네이버 웹툰 ‘싸움의 독학’ 및 TV예능 ‘아는 형님’ 등의 비공식(?) 루트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지만, 당시의 김연자는 오늘날의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던 가요계 최고의 스타였고 작사 및 작곡자도 시대를 풍미한 명인들이었다(이 조합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좀더 설명하도록 하겠다). 웅장한 꽹과리 소리의 인트로(intro)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우승을 확정지은 후 두 손에 가득 쥔 모래를 뿌리며 포효하는 천하장사와 환호하는 관중들이 오버랩되는 장면을 그 시절의 씨름팬이라면 잊지 못하리라.

 

 이전 글에서 ‘손에 손잡고’의 한국어 가사에 담긴 사연을 이야기했었는데, 이 곡 ‘천하장사’에서도 그 가사의 탁월함에 주목해 보려 한다. ‘손에 손잡고’가 전세계의 화합을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풀어냈다면, ‘천하장사’는 스포츠를 구성하는 서사를 3절의 가사 안에 압축하여 표현했다. 수많은 칼럼과 논평도 하지 못한 그 대단한 걸 해낸 주옥같은 표현들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 보자.



https://youtu.be/G5gDvle2Uks

영광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 날의 노래. 당시 아직 고교생이던 강호동이 앨범 자켓에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1절 흥행


씨름판이 열린다 징소리가 울린다
동서남북 방방곡곡 팔도장사 다 모인다
처녀총각 어린아이 할아버지 할머니
웅성웅성 와글와글 신바람 났네
청룡만세 백호만세 천하장사 만만세


 스포츠 역시 대중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 공연 예술이다. 그런 점에서 흥행은 그 종목의 생존을 결정하고 인기를 반영한다. 당시 씨름은 그야말로 과장을 조금 보태 전국 각지의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을 체육관과 브라운관 앞으로 불러 모으는 최고의 흥행 카드였다. 1절의 가사는 거창하고 딱딱한 수치 대신 ‘동서남북’, ‘처녀총각’ 등의 친근한 단어를(더구나 라임까지 느낌 충만한!) 사용하여 씨름의 인기를 보다 직관적으로 실감나게 만들었다. 보고서 혹은 논문 대신 문학의 감성을 차용한 선택은 정말 탁월했다.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대회가 열린 장충체육관. 관중석 매진은 당연한 일이었다.






2절 특징(스펙)


뚱보장사 나오신다 키다리장사 나오신다
거미쥐고 얼싸안고 씨근벌떡 일어섰다
배지기 들어간다 호미걸이 받아라
으랏챠챠 으랏샤샤 땅이 울린다
청룡만세 백호만세 천하장사 만만세


 같은 종목이라도 참여하는 선수들의 신체 조건은 각기 다르며, 해당 종목에는 난이도 높고 화려한 수많은 기술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선수들이 펼치는 화려하고 수준높은 플레이는 수많은 명승부를 연출한다. 야구의 커브와 슬라이더 및 다이빙 캐치, 축구의 트래핑과 크로스 및 헤더, 농구의 스텝백 점프슛과 크로스오버 드리블, 배구의 스파이크와 블로킹 등 각 종목을 대표하는 기술들은 관중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고 경기에 몰입하게 한다. 또한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보유한 일부 매니아 팬들에겐 해당 종목을 깊이있게 즐기고 분석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씨름에도 그런 화려한 테크닉들이 있다. 배지기와 호미걸이 뿐만 아니라 밭다리걸기, 빗장걸이, 차돌리기 등의 기술들은 관중들을 환호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결코 씨름이 그저 투박하고 거친 종목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 보였다(당시 중계진들은 이 모든 기술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었고 정확하게 시청자에게 전달했었다!). 또한 신체 조건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루어낸 이변의 승리가 씨름에는 유난히 많았고, 이러한 반전이 있어 관중들은 더욱 더 승부에 집중하고 열광했었다.

 1절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스포츠의 ‘스펙’을 표현하는 데 많은 말이나 복잡한 개념은 필요없었다. 뚱보장사, 키다리장사, 배지기, 호미걸이라는 4단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연출된 명승부의 감동은 땅을 울리고도 남았다.



‘천하장사’는 곧 이만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3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한국 씨름의 시그니처(Signature)로 남아있다.




3절 의미


뚝심이냐 뱃심이냐 너는 뭐고 나는 뭐냐
삼판양승 오판상승 모래판에 걸은 인생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사나이 승부의 길
웃어도 보고 울어도 봤다 갈림길에서
청룡만세 백호만세 천하장사 만만세
천하장사 만만세~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이며 스포츠를 통해 인생사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격언은 지나치게 많이 인용된 클리셰일 수 있어도, 그 본연의 의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가진 것 없이도 용기내어 세상의 한가운데로 나가고, 일생일대의 기회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면 천재일우의 기회가 오기도 하며, 사력을 다했음에도 마지막에 좌절하는가 하면 뜻하지 않게 원하는 바를 이루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네 삶에서 늘상 재현되는 장면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명승부라 불리는 경기들은 이 모든 것을 보여줬고 또 지금도 그러하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 맛에’ 스포츠를 ‘끊지’ 못한다.


 모래판에서의 승부 역시 우리네 삶의 축소판이다. 뚝심과 뱃심으로 든든히 무장하고 모든 힘을 ‘영끌하여’ 승부에 임한다. 성공의 환희는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고 실패의 아픔은 비통하지만 사력을 다했다는 삶의 의미는 고스란히 남는다. 그러면서 삶에는 영원한 행복도 불행도 없음을 깨닫고(물론 개인별로 그 시점의 차이는 다르지만), 끝이 없는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삶의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 굳이 현학적인 언어 유희를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솔직하고 순박한 말로도 충분히 가능한데 말이다.











대가들이 만든 곡은 ‘리즈 시절’을 구가하던 김연자의 보컬에 힘입어 명작으로 태어났다.



 작사자 조운파는 이 곡 외에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빈잔’, ‘칠갑산’, ‘옥경이’ 등 수많은 히트곡의  노랫말을 썼으며, 작곡자 길옥윤 역시 ‘서울의 찬가’, ‘빛과 그림자’, ‘당신은 모르실거야’, ‘아침의 나라에서’ 등의 작품을 남겼다. 그야말로 제작 단계부터 업계 정상의 대가들의 손길을 거친 것이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연자의 구성진 보컬이 더해졌으니 그 조합만으로도 흥행의 이유가 충분했던 셈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김이나, 윤종신, 아이유의 콜라보쯤 될까(임의로 조합했을 뿐 객관적인 평가나 개인적인 선호가 포함되지 않았음을 밝힌다).

 

 씨름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덕을 톡톡히 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곡의 인기를 설명하기 어렵다. 친근한 언어로 대중의 정서를 사로잡았으면서도 묵직한 삶의 의미를 흥겹게 전달한 작품은 예술의 전 영역으로 넓혀도 드물다. 그 어려운 것을 해냈기에 아직도 이 곡은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는 게 아닐까? 씨름의 전성기는 갔을지언정 그 유산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예능에 등장하는 강호동과 이만기 등과 더불어 이런 모습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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