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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Sep 29. 2020

30년 후에 봐서 다행이었다

때로는 ‘본방 사수’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노팅 힐(Notting Hill), 펠리컨 브리프(Pelican Brief),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enemy),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My Best Friend’s Wedding) 등에 출연한 헐리우드 스타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를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린 작품으로는 23세 때인 1990년 리처드 기어(Richard Gere)와 함께 출연한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이 꼽힌다. 터치스톤 픽처스(Touchstone Pictures)에 의해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으나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흥행에 성공하며 ‘천문학적 수익률’을 기록했다. 당시 한국에서도 극장 개봉, 비디오 대여에서 승승장구했다.


 이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 등급이긴 했으나 당시 비디오 대여의 문턱은 높지 않았기에 중학생이던 나 역시 충분히 볼 수 있었다(사실 집에서만 안 들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나는 영화라는 ‘물건’에 거의 ‘노 관심’이었던지라 비디오 대여점을 그냥 지나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워낙 크게 흥행한 작품이라 포스터를 자주 접하던 기억은 생생하다.


30년 후 세상의 거의 모든 영화는 화학적으로 압축되어 넷플릭스라는 거대 플랫폼 안에 자리잡았다. 덕분에 개봉 당시 그냥 지나쳤던 작품들을 대거 볼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재개봉을 했음에도 지나쳤던 타이타닉(Titanic) 포함이다). 지나간 시절의 영화 관람 후기는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된다. “이 좋은 걸 왜 그때는~~”이란 후회를 하는가 하면  “아 이런 거였네”며 느긋하고 여유있게 웃음짓기도 한다.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이 근래에 배달해 준 ‘귀여운 여인’은 전형적인 후자 유형의 로맨틱 코미디였다. 그리고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개봉 당시가 아닌 지금 본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물론 그동안의 세월만큼 ‘스포’를 접했지만 감상의 즐거움엔 별 영향이 없었다.



20대의 발랄한 줄리아 로버츠와 40대의 능숙한 리처드 기어의 조합이 만든 유쾌한 이야기. ‘엄근진’이었다면 영화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사회를 조금은 더 알아서 다행이었다


 리처드 기어가 연기한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 루이스는 기업을 인수해서 매각하는 사업을 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사모 펀드(PEF)를 비롯한 소위 ‘기업 사냥꾼’들이 행하는 기업 인수/합병(M&A) 등의 비즈니스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직업은 물론이고 세부적인 프로세스가 대중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금융 자본주의가 일찍부터 자리잡은 미국에서는 이미 기업 자체가 거래의 매물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듯 주로 미국 동부의 아이비 리그 등의 명문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이 선택하는 직업이다. 극중의 에드워드도 뉴욕에서 사업차 L.A로 와서 비벌리 힐즈로 가던 중 우연히 비비안을 만나게 된다(참고로 이 때만 해도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의 위상은 지금같지 않았으며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전형적인 미국의 부유층 남성답게 에드워드는 출장 중 최고급 호텔에 머무른다. 프런트 직원과 지배인(Manager)은 상류층 고객의 모든 취향을 고려하여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비비안은 에드워드를 따라다니며 오페라 관람, 폴로(Polo) 경기장 방문, 프렌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등 그때까지 평생 접하지 못했던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미국 부유층이 즐기는 문화 생활의 일부이다. 폴로 경기장에서 에드워드는 상원 의원(Senator)을 만나 사업에 대한 논의(로비?)를 하는데 이 또한 그들만의 거래의 성격이 뚜렷하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영어조차 처음 접한 입장에 불과했고 세계사 특히 서양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그게 무슨 맛인가?’라는 수준의 생각 이상은 하지 못했다(물론 그 후엔 나름 관심 분야가 되었지만). 그 상황에서 영화를 봤다 한들 해롭진 않았어도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게 분명하다.



미국은 자유롭기도 하지만 계층 격차가 매우 큰 나라이기도 하다. 청소년의 시야에서 담기엔 버거운 사실이었다.



로맨틱 코미디는 그저 편하게 웃으며 보는 거다


 영화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특히 로맨틱 코미디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화려하고 훈훈한 외모의 남녀가 그림같은 풍경에 등장하여 만들어가는 ‘유치달콤한’ 사랑 이야기는 현실에 치여 지친 많은 사람들을 잠시나마 웃게 만들고 퇴화되었던 사랑의 촉수를 다시금 자극하기도 한다. 흔히들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본다’고 하는데, 로코는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본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런데 청소년이라면 그렇게 여유있게 피식 웃어가며 로코를 볼 수 있을까? 극중의 사랑 이야기에 과몰입하고 남녀 주인공을 흠모하며 현실과 허구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에 빠져 침울해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 시절엔 애절한 사랑 이야기라고 느껴 감정 이입하며 봤던 하이틴 영화, 트렌디 드라마들은 지나고 나서 보니 한낱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관계들로 가득 찬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성인이라면 그런 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웃자고 보는 거라며 처음부터 기대 따윈 내려놓고 여유롭게 봤을 텐데 말이다.


 물론 사춘기의 감정도 소중한 추억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 작품은 기왕이면 균형잡힌 관점에서 제대로 감상하는 게 좋다는, 점에서 성인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관람 태도가 로코에는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예전 생각에 이불킥해도 할 수 없다.



감정 이입이 해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아름다운 추억인 것도 아니다.




남자의 허전함과 외로움을 조금은 더 이해하고 봤다


 에드워드 루이스의 ‘스펙’으로 단 하루 아니 한 순간도 살아보진 못했지만(앞으로도?), 그가 느꼈을 마음의 피로는 희미하게나마 이해한다. 본인의 능력만큼 품위있고 세련된 매너로 항상 모든 사람을 대해야 했고,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각종 고뇌는 차마 표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고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지만, 조건을 떠나 상대방과 서로 사랑한 경험은 언제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도 드물다. 에드워드가 파트너 변호사에게 ‘니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날 부자로 만들었다’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그동안 그가 느꼈을 외로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지쳐있던 에드워드에게 나타난 비비안은 매사에 솔직했고 거리낌이 없었다(물론 처음엔 어디까지나 본인의 직업에 충실해서였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비비안은 에드워드에게 그저 순수하고 참신한 느낌을 줬고 본인도 모르게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의 차원에서 두 사람이 맺어지는 것은 ‘공상과학 동화’에 다름없지만, 외로움이 인간으로 하여금 의외의 선택을 하게 만든다는 점은 대략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사회적으로 남성에게 경제적 능력 그리고 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침착함, 평정심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남성의 솔직한 감정 표현에 관대하지 못한 시선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와 같은 남성들도 가끔은 사회적 기대치에 압박을 느끼는데 하물며 그토록 유능하고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기대의 수준은 한층 높을 것이다. 에드워드에게 있어 비비안은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일탈의 창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라 해도 한 인간으로써 마주하는 공허함은 피해갈 수 없었다








 영화에 대한 무관심은 청소년기 이후로도 쭉 이어졌고 심지어 대학 시절엔 영화를 한낱 ‘데이트의 도구’로 여길 정도의 엽기적인(!) 생각에 젖어 있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고 작품과 함께 사색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갔다. 물론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독서를 해오고 있지만, 세상은 하나의 수단만으로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을만큼 평면적인 게 아니란 것을 갈수록 느끼게 된다. 그리고 유튜브의 등장으로 영상의 전성 시대가 열린 지금, 둔하기 그지 없는 나의 영상 감성 앞에서 지난날의 ‘업보’를 만나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바일 플랫폼은 내게 ‘녹화’로나마 추억의 명작들을 접할 기회를 열어주었다. 여러 가지 배경 지식이 조금 더 생겼고 영화에 대해 마음이 열린, 바로 지금이 많은 것을 즐기고 느끼기에 오히려 더 좋겠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는 ‘연령 제한’이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패자부활전(?)에 적극적으로 나서 봐야겠다. 우승은 못해도 좋다. 그저 더 넓고 깊은 시야가 생기고 감성이 ‘말랑촉촉’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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