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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Oct 13. 2020

크리스틴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만이 널 행복하게 해줄거란 착각

 나폴레옹 3세 치하의 제정 시대인 1861년 착공되어 제 3공화정이 출범하던 무렵인 1875년 완공된 파리 오페라 극장(Paris Opéra)은 화려한 외관으로도 유명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에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최첨단 공법으로 지어진 19세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공사를 진두지휘한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Charles Garnier)의 이름을 따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로 불리기도 한다. 지상 5층 전체에 걸쳐 있는 2000여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객석과 공연 중 특수효과를 위한 각종 기계장치, 천정 중앙부의 샹들리에 등 사진으로만 보아도 그 압도적이고 웅장하며 화려한 자태가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놀랐던 점은 지하 공간을 파내려갔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빌딩 건축시 비용 부담 및 공법의 어려움 등으로 지하 공간을 건축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고려해 보면 그야말로 시대를 주도하다 못해 앞서간 건물이 아닐 수 없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 외관. 그야말로 ‘플렉스’와 ‘스웩’의 느낌이 넘쳐난다



하지만 파리 오페라 극장의 존재감이 한 차원 높게 ‘볼륨 업(volume up)’된 계기로는 단연 1910년 발표된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Le Fantôme de l'Opéra)이 꼽힌다. 다방면에 초인적 능력을 지닌 에릭(Erik)이란 인물이 마치 유령과도 같이 음지에서 오페라 극장의 모든 것을 조종하며 벌어지는 미스테리와 최고의 디바 크리스틴 다에(Christine Daaé)를 둘러싼 두 남자의 사랑, 에릭이 크리스틴을 납치한 후 펼쳐지는 오페라 극장 지하에서의 라울(Raoul)과 페르시아인의 목숨을 건 탐험 등의 이야기가 미로같이 복잡한 오페라 극장을 배경으로 숨가쁘게 펼쳐진다. 이 소설은 영화와 뮤지컬로도 여러 차례 각색되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가 작곡한 1986년 뮤지컬이다. 크리스틴 역을 맡은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크게 화제가 되었는데 이후 크리스틴 역을 맡은 배우들은 일일이 사라 브라이트만과 비교되는 고충(굴욕?)을 겪기도 했다.



https://youtu.be/G2zxzaWgVRA

뮤지컬이 아닌 영화 장면이지만 보컬은 사라 브라이트만으로 동일하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연 실황이나 영상에 앞서 책으로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생동감이 부족하며 보다 집중하고 상상해야 한다는 ‘핸디’는 있었지만 각각의 캐릭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서술을 접할 수 있었고, 인물의 심리에 대한 치밀하고도 섬세한 분석과 오페라 극장 내부를 눈 앞에 해부하여 펼쳐보이는 듯한 묘사는 독서의 노고를 잊게 할만큼 인상적이었다.

 

 전세계의 수많은 독자와 청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다 못해 닳도록 ‘스포’가 된 작품을 굳이 해설하고 분석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작품에서는 크리스틴이 그저 두 남자의 과한 사랑을 받는 대중의 스타로만 그려지는데 과연 그녀의 내적 서사도 그토록 평탄할까에 대해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의문(딴지?)을 던지고 싶었다. 작품의 화려한 ‘인테리어’에 행여 크리스틴의 말 못할 고충이 가려져 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크리스틴은 과연 두 남자의 사랑이 달갑기만 했을까?







 

 책에서 영상과 가장 달리 묘사되는 인물은 ‘유령’이다. 소설에서는 에릭이라는 분명한 이름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으로 나오며, 건축과 음악, 문학, 과학 등에 통달한 천재적인 인물이다. 어린 시절 흉측한 외모로 인해 부모에게서조차 버림받았으나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고, 유럽과 페르시아를 거치며 목숨을 건 모험을 한 끝에 습득한 역량으로 오페라 극장 지하에 자신만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다. 호수 근처에 모든 것이 갖춰진 현대식 거주지를 마련해 놓았으며, 대단한 와인 애호가답게 거대한 와인 창고를 보유하고 있다. 마지막에 라울과 페르시아인이 갇히는 고문실은 전기 난방과 홀로그램(hologram)이 가능한 첨단의 공간이며, 거대한 배수 펌프를 이용한 배수 시설마저 갖추고 있다. 신체적 능력과 힘도 어마무시한 수준이라 어지간한 사람은 완력으로 쉽게 제압한다.


 크리스틴에게 구애하는 라울은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집안의 도련님이다. 형과는 20살이나 차이가 나는 탓에 과보호 속에서 자라나며, 좋은 교육을 받았고 사교계의 많은 모임의 기회가 제공되지만 자기 힘으로 무엇 하나 개척할 줄 모른다. 그저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난 소꿉친구일 뿐인 크리스틴에게 마치 자신이 ‘운명의 왕자님’이라도 되는 양 근자감 넘치는 태도로 접근하여 상대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본인의 의지가 아닌 집안의 지시로 북극 여행을 떠난다.


  미모와 명성을 모두 가진 스타 크리스틴은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의 많은 남정네들에게 ‘희망고문’을 가한다. 두 남자는 어쩌면 그 많은 이들의 대표라고 해도 무방한 셈이다. 얼핏 보면 세상의 관심과 주목을 한 몸에 받는 ‘퀸카’로서의 화려함만이 부각되며 혹자는 크리스틴이 행복한 고민에 빠져 ‘어장 관리’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리스틴은 극중 모든 캐릭터 중 가장 난처하고 어려운 입장에 놓였던 인물이었다.


 크리스틴은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맹목적이고 병적인 집착을 고스란히 홀로 견뎌내야만 했다. 에릭은 음악의 스승이라는 이유를 앞세워 강압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강요한다. 평생 동안 소외당한 기억은 비뚤어진 욕망으로 변질되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얻으려 한다. 그게 설령 물질이 아닌 사람의 마음일지라도 말이다.

 라울이라고 크리스틴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크리스틴에 떨어져 지낸 세월과 각자의 상황적 맥락을 모두 무시한 채 그저 직진할 뿐이다. 크리스틴이 에릭의 존재를 차마 밝히지 못해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빠져 있어도 안정시키고 기다려주기는 커녕 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보라며 철없이 채근한다. 오페라 극장을 탈출하기로 합의하는 과정에서도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는 뒷전이고 그저 내일이면 크리스틴과 함께 있을 거란 ‘동화적 공상’에 빠져 있었다.


 에릭의 사랑은 엇나갔고, 라울의 사랑은 사려깊지 못했다. 두 남자는 본인의 이기적이고 설익은 감정만 앞세웠고 크리스틴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엔 관심조차 없다. 오직 나만이 널 사랑하며 나와 함께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라며 본인들의 사랑을 정당화하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니들 생각’이고 ‘뇌피셜’일 뿐이다. 이제 막 성공 가도에 올라 대중의 쏟아지는 관심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고 든든한 후견자이던 발레리우스 부인도 연로하여 언제 떠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크리스틴이 마음 편히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쪽에선 위협하고, 다른 쪽에선 징징대니 정말 난감하고 괴로웠을 것이다. 



열렬히 사랑한다지만 사실 둘 다 크리스틴에게 ‘일생에 도움이 안 되었다’.

 

 작품에서는 크리스틴이 에릭에 대한 연민으로 키스를 허락한다고 서술되지만 사실 그 시점에서 크리스틴은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너무도 끔찍하고 두려웠지만 생존을 위해 일시적인 타협을 했고 결국 빠져나와 라울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든든하지 못하고 유아적인 라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신뢰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래도 에릭보단 덜 무섭고 게다가 귀족이니 결혼하면 최소한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란 생각(계산?)에서 라울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면 너무 잔혹하고 속물적인 해석일까?


작품의 시공간적 맥락을 더 넓혀 보면 프랑스의 1870년대는 1830년의 7월 혁명, 1848년의 2월 혁명,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의 코뮌의 투쟁 등을 모두 겪으며 시민의 권리와 입지가 진일보한 시점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일련의 격동을 거친 후 공화정의 확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이성보다는 자유로운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사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진보의 결실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자아와 가치관은 거의 존중받지 못했다. 자연히 남녀 관계에서도 여성들은 종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브리엘 코코 샤넬(Gabriel Coco Chanel)이 여성의 자유를 외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시절은 안타깝게도 아직 오기 전이었다.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있다. 상대를 진정으로 배려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사랑에 빠진 내가 너무 신기하고 대견스럽고 기특하여 그에 취해버리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생각은 그 사람의 시야를 좁히고 독선에 빠지게 만든다. 결국 오직 나의 사랑만이 선하고 옳으며, 나 아닌 그 누구도 그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이 상황에서 상대방이 부담감을 표현하거나 이별을 선언하게 되면 비탄에 잠기고 심지어 어긋난 행동까지 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반대의 상황에서는 그대를 사랑하는 내가 아닌 상대방을 미워한다는 점이다. 크리스틴을 납치한 에릭의 광기, 겁에 질려 자신을 피하는 크리스틴에 대한 라울의 질책은 모두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행동이었다.


 만약 에릭이나 라울이 보다 차분하고 사려깊은 모습을 보였고 둘 중 한 사람과 자연스럽게 맺어졌다면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우리는 오페라 극장의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감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납치와 탐험 모두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크리스틴은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진정 행복하고 또한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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