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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Oct 16. 2020

파리를 수놓은 여대생의 사랑 노래

소피 마르소가 안내하는 ‘랜선 파리 여행’

 예전보다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원작과는 다른 제목으로 국내에 개봉하는 영화들이 종종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그 유명한 ‘사랑과 영혼’의 원제는 ‘Ghost’이며, ‘나를 찾아줘’는 ‘Gone Girl’, ‘미녀 삼총사’는 ‘Charlie’s Angels’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Mean Girls’가 ‘퀸카로 살아남는 법’으로, ‘White Man Can’t Jump’가 ‘덩크슛’으로  ‘천지개벽’한 경우도 존재한다.


 1989년 봄 국내에서 개봉되어 소피 마르소(Sophie Marceau)의 존재감과 매력을 한껏 부각시켰던 프랑스 영화 ‘유 콜 잇 러브(You Call It Love)’ 역시 ‘L’Étudiante’(여학생)이라는 원제가 따로 있었다. 다만 관객들이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않았는데다가 노르웨이 가수 카롤리네 크뤼거(Karoline Krüger)가 부른 동명의 주제곡이 워낙 큰 인기를 얻었기에 무난히 해당 제목으로 개봉되고 훗날까지 기억될 수 있었다.



우측 상단의 빨간 박스 안에 주제곡 You Call It Love가 적혀 있다


 작곡가 에두아르는 스키장 리프트 안에서 대학생 발랑틴을 본 후 한눈에 반해 무작정 들이대고 영화라는 ‘은혜로운 설정’은 둘을 연인으로 만든다. 마침 외롭기도 했고 시험 전의 여유나 즐기자는 생각으로 발랑틴은 에두아르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한 번 만나 보기나 하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고, 흔한 연인들의 행로를 밟아간다. 데이트 후에도 보고픈 마음에 밤새 통화하고, 멀리 떨여져 있다가도 ‘순간이동’하듯이 달려가 만나기도 한다. 에두아르의 전처 로라가 작정하고 끼어들며 도발하는 바람에 둘은 크게 다투지만, 안아주고 달래주고 눈물 닦아준 뒤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그런 ‘고전 연애 동화’ 식의 결말로 무사히 마무리된다. 소르본 대학(Sorbonne Université) 광장에서 포옹하는 두 사람을 카메라가 줌 인(Zoom In)하는 와중에 ‘You Call It Love’가 흐르며 그들의 사랑은 또 다른 시작을 기약한다.


 흔한 로맨스 영화의 포맷을 따랐고 스토리 라인도 크게 복잡하지 않아 편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두 주인공을 맺어주기 위해 다른 캐릭터 아니 작품 전체가 ‘병풍’을 자처했기 때문에 딱히 민감하거나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지도 않고 인물의 심리 변화도 복잡할 것이 없다. 다른 배우들의 존재감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사실상 전성기에 막 들어선 소피 마르소가 압도적인 ‘개인기’로 극 전체를 이끌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고 몇 년만에 다시 관람하는지라 작품에 나온 파리의 풍경과 프랑스인들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다 여유로우면서도 세심하게 관찰해 봤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여전히 파리가 여행의 ‘본좌급 명소’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국에 간접적으로나마 여행의 재미를 느끼고 살짝이나마 기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덤이었다.






 


파리 시내의 주요 장소


Gare de Lyon : 에두아르가 파리에 도착한 후 발랑틴을 따라 지하철을 타는 곳



 이름과는 달리 리옹이 아닌 파리의 7대 대형 철도역 중 하나로 TGV전용 역사이기도 하며 프랑스 주요 지방으로 향하는 국내선 및 이탈리아, 스위스 방면의 국제선 열차를 탈 수 있다. 연간 1억 명 이상의 승객이 이용하며 당초에는 1900년에 세계엑스포 전시장으로 건설되었다. 런던의 빅 벤(Big Ben)을연상하게 하는 시계탑이 설치된 고풍스러운 건물이다. 파리의 11E Arrondissement(약칭 ARR, 보통 ‘구’라고 번역한다)에 있으며 파리 시내 전체에서는 중앙보다 약간 동쪽에 위치한다.



Pont Neuf : 발랑틴이 사는 곳 근처이며 아침 등교길(출근길)에 지하철 역을 나와 지나치는 교량



 센(Seine) 강에 있는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Pont Neuf는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다. pont 자체가 교량을 의미하기 때문에 퐁뇌프 다리는 ‘역전 앞’처럼 어휘가 중복된 표현이다. 이 다리 이후로 석조 교량이 지어졌으며 다리 중반부에는 위그노(Hugnot)를 비롯한 개신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낭트(Nante) 칙령(1598년)을 선포했던 앙리 4세(Henri IV)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파리 10E ARR에 있으며 루브르(Louvre) 박물관과 가깝고 노트르담(Notre-Dame) 성당이 있는 시떼 섬(Île de la Cité)과 연결되어 있다.



Centre Pompidou : 아랍계 이민자(아마도?)에게 담배연기를 내뿜는 남성에게 발랑틴이 인종차별이라며 항의한 곳. 야외 광장에서 에두아르의 전처 로라와 아들 니콜라를 처음 만났다.



1971년 착공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르주 퐁피두(George Pompidou)의 이름을 딴 건축물로 1977년 1월에 개장했다(퐁피두 대통령은 임기 중인 197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건물 철골과 유리면이 드러난 마치 공사 중인 듯한 독특한 외관이 특징이다. 하이테크 건축의 대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와 렌조 피아노(Lenzo Piano)의 합작 설계 작품이며 원래 빈민가였던 보부르 지역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지어졌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이 내부에 입주하고 있으며 피카소, 칸딘스키, 마티스, 샤갈, 미로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과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 등 다양한 현대 미술작품을 볼 수 있다. 파리 10E ARR에 있으며 파리 시청사와 가깝다.



Sorbonne Université : 발랑틴이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르며 학교 생활을 하는 곳. 엔딩 장면에서 에두아르와 발랑틴이 포옹하는 광장.



뤽상부르 공원(Le Jardin du Luxembourg) 근처에 위치한 국립대학이며 1257년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에 의해 설립된 파리 대학교(Université de Paris)가 전신이다. 원래 종합대학이었으나 1968년 5월 혁명으로 인해 문학대학인 파리 제4대학교(Université Paris-Sorbonne, Paris-IV)와 의학/이학대학인 파리 제6대학교(Université Pierre-et-Marie-Curie, Paris-VI)로 분리되었다가 2018년부터 다시 합쳐져 소르본 대학교로 이름을 되찾았다. 개교 당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교,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더불어 서구권 최초의 대학 중 하나였다.



프랑스 대학생들의 학교 생활


발랑틴의 전공은 고전 문학으로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많은 학습량이 필요하다. 프랑스어 외에도 라틴어와 그리스어 시험까지 치러야 하며 4월의 필기 시험과 6월의 구술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만 한다(참고로 라틴어는 동사의 변화형만 해도 60가지가 넘으며, 그리스어는 알파벳과 문자가 다르다). 에두아르가 ‘행복한 순간을 망치지 말자’라고 하자 발랑틴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를 인용한 거냐?’라고 묻는 장면은 그녀가 시험 준비에 얼마나 몰입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와중에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중학교에서 파트 타임 교사로 근무하기까지 하니 발랑틴은 매일 바쁘고 피곤할 수밖에 없다.


 

 유명한 대입 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éat)처럼 프랑스의 필기 시험은 모두 주관식이며 해당 개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주관적 해석을 체계적으로 적어내야 한다. 필기를 통과한 발랑틴은 함께 사는 친구 셀린느와 프랑스어 구술 시험을 치르러 간다. 강의실에 입장하기 전 신원을 확인하면 감독관들이 문제가 적힌 쪽지를 배부하며 입장하면 8~9명의 면접관이 기다리고 있다. 이들 앞에서 학생들은 주제에 관해 구술해야 하며 소수의 지인들에게 참관이 허용된다(다만 심사가 시작되면 당사자를 제외하고 모두 퇴장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먼저 시험을 치른 친구 셀린느는 불합격하고 5년의 공부가 물거품이 됐다며 눈물을 보인다. 뒤이어 들어간 발랑틴은 몰리에르(Molière)의 작품을 주제로 시험을 치른다(재미있게도 해당 강의실 뒷편에 몰리에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프랑스에서는 한국과 같은 주입식 교육이 득세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대신 고도의 사고력과 철학적 해석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학위는 고사하고 수업을 따라가기조차 힘들다. 절대평가라고 해도 전국의 수준 높은 인재들이 모두 모여 있어 평가 기준이 높다. 대학 공부가 결코 만만치 않은 이유이다.




프랑스인들의 라이프 스타일 및 가치관


에두아르는 첫 만남에서부터 본인이 이혼남임을 밝히고 전처와 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발랑틴은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이후 퐁피두 센터에서 전처 로라와 아들 니콜라를 만나는데 니콜라는 아빠의 여친에게도 매우 자연스럽게 인사한다. 좋은 말로 하면 상대방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이고 다른 말로 하면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관습인데, 인간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가치관이 한국과는 크게 다르다. 하지만 이 만남이 결국 갈등과 분쟁의 단초가 되는 것을 보면 아무리 프랑스 사회라도 파트너의 이전 배우자를 상대하는 것은 껄끄러움을 알 수 있다.



 발랑틴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주방을 공유하는 공동 주택이다. 과거 한국의 하숙집과 유사한 구조인 듯 했는데 같이 사는 사람들끼리 식사를 함께 하며 개인사도 털어놓는다. 그리고 발랑틴과 셀린느의 구술 시험에 응원을 위해 하우스 메이트들이 참관하기도 한다. 물론 과거 한국의 시트콤이나 드라마에서도 하숙생들끼리의 친분을 다소 과도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극중의 모습이 실제와 같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인구 밀도가 높고 주거난이 심각한 파리 시내에서 공동 주택이 많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외 숨겨진 깨알 재미들



에두아르의 차는 빨간색 푸조 컨버터블이다. 최근 출시 모델과는 달리 소프트탑을 장착하고 있다. 두 사람의 낭만적인 키스 장소가 되기도 했다.





에두아르와의 통화 도중 발랑틴은 아예 전화기연결선까지 방으로 끌고 와서 통화한다. 자신의 방 안에서 더 포근하고 편안하게 대화하기 위함이다. 지금은 핸드폰이 없이 어떻게 살까 싶지만 그 시절엔 나름의 낭만이 있었다.




에두아르와 발랑틴이 키스를 나누는 엘리베이터. 외부로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래된 건물이 많은 파리엔 아직도 이런 엘리베이터가 있다




 여러 유럽 도시들이 그렇듯이 파리에도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점들이 많다. 극중에 등장하는 소르본 대학 앞 레스토랑 L'ecritoire 역시 외관은 약간 변했지만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 위쪽이 영화 촬영 당시의 1988년의 모습이고 아래가 2020년 현재의 모습이다.







 흔한 연인들의 사랑과 다툼을 다루던 영화는 막바지에 발랑틴의 발언을 빌려 보다 성숙한 남녀 간의 사랑이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라 말하며 막을 내린다. 발랑틴은 독립적인 여성들의 애정 문제를 다룬 작품을 소재로 구술을 시작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역설하던 중 강의실에 들어온 에두아르를 발견하는데, 이 때부터 텍스트가 아닌 현실에 기반한 유연한 해석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발랑틴은 에두아르를 바라보며 ‘날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날 받아주고 나도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면접관이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지적했으나 발랑틴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작품을 분석하면 안 되는가?’라고 되물으며 발언을 이어나간다.


 아래에 소개하는 세상 모든 남녀의 만남에 대한 본질적인 해석과 통찰을 담은 희곡의 대사는 이 영화의 주제를 인상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발랑틴은 이 발언을 끝으로 시험을 마치고 당연히(?) 합격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한껏 표현된 소피 마르소의 지적 ‘스웩’은 안 그래도 매력적인 그녀를 ‘완전체’로 격상시켜 버린다.



모든 남자는 거짓말쟁이에 수다스럽고 일관성이 없으며, 비열하고 위선적이며 겁쟁이에 자존심이 강하고 쾌락을 추구한다

모든 여자는 변덕이 심하고 허영심이 많으며 타락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단 하나 신성한 것이 있다면, 불완전한 남녀의 결합이다



https://youtu.be/-5Zz4cBPY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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