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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Oct 20. 2020

영화지만 현실성은 중요합니다

언어의 손바뀜이 만들어낸 몰입감

  미국 L.A의 헐리우드(Hollywoo)는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시작된 영화라는 예술 장르를 대중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오늘날 세계 영화 산업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때문인지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는 유럽을 배경으로 하거나 비영어권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더라도 모든 대사가 영어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글래디에이터(Gladiator, 2000)같은 경우는 워낙 오래된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당시의 라틴어 대사를 일일이 구현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긴 했지만, 안나 카레리나(Анна Каренина, 1997)나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2012)처럼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조차 모든 대사는 영어였다. 물론 현지 배우만으로 출연진을 구성하는 것도 어렵고 영어 대사 때문에 원작의 내용이 왜곡된 것도 아니었지만 해당 작품의 고유 언어(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했더라면 작품의 리얼리티가 훨씬 더 부각되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 점에서 2015년 개봉된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는 공간적 배경에 따라 해당 지역의 언어를 ‘맞춤 삽입’한 탁월한 편집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극중 주인공이 현재의 삶을 사는 미국에서는 영어, 어린 시절 살았던 모국 오스트리아에서의 회상 장면에서는 독일어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영화에 보다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했고 각각의 공간에 걸맞는 느낌을 연출했다.


1998년 마리아 알트만(Maria Altmann)은 언니의 장례식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지난날 모국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왔던 편지를 읽고 오스트리아의 미술품 반환법의 개정 소식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치(Nazi)에 의해 몰수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그린 마리아의 숙모 아델레(Adele)의 젊은 시절 초상화를 되찾으려는 결심을 한다.

 마리아는 지인의 아들인 변호사 랜디 쇤베르크(Randy Schoenberg)와 함께 험난한 투쟁에 발을 들인다. 랜디는 처음에는 그림의 금전적 가치를 보고 사건에 착수하지만 점차 마리아의 입장에 공감하게 되고 자신 역시 유대인의 후손이라는 점을 절감하며 꼭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결국 랜디는 사직서까지 내고 사건에 매달린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와 미국을 오가며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미국으로 사건을 가져와 미국 대법원 재판에서 승소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이겨 마침내 마리아는 그림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다. 실제 인물 마리아 알트만이 국가를 상대로 반환 소송에서 승리한 새로운 법적 판례를 만든 유명한 사건을 재현하여 큰 화제가 되었으며, 클림트가 그린 해당 작품 역시 이 영화를 계기로 다시 주목받았다.












 영화의 구성을 더욱 풍요롭게 한 것은 간간이 삽입되는 마리아의 젊은(어린) 시절 회상 장면이었다. 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명문가 블로흐 바우어(Bloch-Bauer) 가문에서 태어나 행복한 유년기를 보낸다. 아버지와 삼촌은 모두 부유한 사업가였고, 아이가 없었던 숙모는 마리아를 딸처럼 아껴주었다.



명문가답게 마리아의 집은 사교계의 부유하고 교양있는 손님들로 늘 북적인다. 결혼식에서 남편 프리츠(Fritz)는 직접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주고, 모든 하객은 행복하게 피로연을 즐긴다. 유럽 상류층의 취향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작품을 화려하게 빛내주는 볼거리 중 하나이다.


하지만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면서 유대인인 마리아 집안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결국 프리츠와 마리아는 탈출을 감행하고 독일 쾰른(Köln)을 거쳐 미국으로 도주한다. 안타깝게도 마리아의 부모님은 함께 가지 못한다.




사이먼 커티스(Simon Curtis) 감독은 작품의 현실적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이 모든 장면에서의 대사를 독일어로 구성했다.  덕분에 관객의 입장에서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가 그 공간에 발딛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작품과 보다 긴밀히 소통할 수 있었다. 참고로 마리아의 숙모 아델 역을 맡은 안티에 트라우에(Antje Traue)만 독일인이고 회상 장면에 등장하는 다른 대다수의 배우들은 영국과 캐나다, 스웨덴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이었지만 모두가 능숙한 독일어를 구사했다. 노년의 마리아 역시 미국에서 언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안녕, 사랑하는 언니(Auf Wiedersehen, liebe Schwester)’라고 짤막하게 독일어로 작별인사를 한다.


 두 언어의 배열이 가장 극적으로 부각되어 빛났던 장면은 마리아가 빈을 탈출하기 직전 부모님과 나누는 작별 인사의 순간이다. 마리아의 아버지 구스타프는 건강이 악화되어 거동이 불편했지만 딸 앞에서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부모를 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딸을 향해 아버지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며 안심시키고 용기를 준다. 그리고 독일어를 중단하고 영어를 사용하며 미국에서의 딸의 미래를 축복한다. 이 장면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하여 잠시 영화를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딸은 미국으로 떠나가 자유를 찾겠지만, 오스트리아에 남은 부모는 나치에게 핍박당하며 심지어 수용소로 끌려갈지도 모를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저 자식의 행복만을 기원할 뿐이었다. ‘행복한 추억과 (영원한)이별의 슬픔이 담긴 날들’에서 ‘시련을 딛고 희망을 노래할 날들’로 넘어가는 순간을 언어의 뒤바뀜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해 표현한 것이다. 아래 사진의 위는 독일어 대사이고 아래는 영어 대사이다.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냈지만 마리아와 랜디의 첫 만남은 그리 화기애애하지 못했다. 마리아에게 랜디는 철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신출내기였으며, 랜디에게 마리아는 까탈스럽고 무뚝하며 고집불통인 노인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톰과 제리처럼 티격태격하고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는 상대방에게 상처받기도 하지만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가면서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고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이해하게 된다.


 랜디는 빈 시내에 놓여있는 2차 대전 당시 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기념비 앞에서 마리아로부터 자신의 조상들에 대한 회상을 듣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삼키려 안간힘을 쓴다. 이 장면에서 랜디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 비로소 인식하고 마리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미국 대법원 재판에서 승소한 후 마리아는 대기업 에스티 로더의 상속자로부터 미술품 환수 전문가인 노련한 변호사를 붙여주겠다는 제안을 받지만, ‘초등학생(school boy)’과 끝까지 함께 할 거라 말하며 제안을 거절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마리아는 랜디를 가슴깊이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그림을 돌려받게 되었지만 마리아는 생각했던 것만큼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과 삼촌, 숙모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고 말로 못할 슬픔이 몰려온다. 자신만 살겠다고 미국으로 도망쳐 왔다는 죄책감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안고 살았던 마리아. 그 모든 슬픔과 소송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 및 서러움이 몰려와 흐느껴 우는 그녀를 랜디는 말없이 꼭 안아준다.



마리아 역의 헬렌 미렌(Helen Mirren)과 랜디 역의 라이언 레이놀즈(Ryan Reynolds)는 의뢰인과 변호인 간의 애증관계를 능숙하고도 재치있게 연기하며 극의 중심을 잡았다. 또한 극중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들의 성격과 습관까지 세심히 연구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한껏 높였다.






 



 20세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응답하라’ 시리즈는 극중 배경과 동일한 지역 출신으로 출연진을 구성했다. 이 캐스팅은 신의 한 수가 되어 서인국, 정은지, 이일화, 정우(김정국), 고아라 등 영남권 출신 배우들은 마치 물 만난 듯 자신들의 모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작품의 리얼리티를 한껏 끌어올렸고 전국적인 흥행을 주도했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만약 서울 출신의 배우들이 어색하기 그지 없는 경상도 방언을 힘들여 구사했다면 그만큼의 인기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하나의 극을 구성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의 포맷과 기획 의도이다. 하지만 현실성있게 구성된 시공간적 배경과 해당 상황의 맥락이 없다면 관객들은 그만큼 극에 몰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출연 배우의 대사는 극의 모든 구성 요소 중 관객과 만나는 최전방에 위치한 첨병이며, 어떤 어휘와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극의 완성도 자체가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약간(과연?)의 수고를 더하여 두 언어를 교차 편집한 ‘우먼 인 골드’의 선택은 탁월했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적어도 오스트리아(Österreich)가 호주(Austrailia)와는 전혀 다른 나라임을 알게 되었을테니 말이다.




한국에서도 제법 흥행했던 작품이고 지금도 넷플릭스에서 관람할 수 있지만 영화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스포?)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 아래의 링크를 첨부합니다.

다음 영화 ‘우먼 인 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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