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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Oct 23. 2020

피렌체에도 ‘당연히’ 헬스클럽이 있습니다

유럽의 ‘오늘’과 ‘여기’

스페인 축구 대표팀이 유로에서 우승하며 메이저 대회 3연패(3-peat)를 달성한 2012년 여름 ‘나만의 또다른 유로’를 즐길 수 있는 열흘의 시간이 주어졌다. 비록 별다른 준비를 못해 패키지 상품을 이용했지만 10년만에 유럽 여행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게다가 밀라노(Milano), 피렌체(Firenze), 나폴리(Napoli), 제네바(Genève) 등 처음 방문하는 도시들이 여정에 포함되어 있어 기대는 더욱 컸다.


샤모니(Chamonix)에서 몽블랑 터널(Tunnel du Mont-Blanc)을 통과해 밀라노에 도착해 하루를 보내고 피렌체로 향했다. 그야말로 ‘샤이니’한 이탈리아의 여름 날씨는 덥기는 해도 습도가 낮아 쾌적함마저 느끼게 했다. 맑은 하늘 아래의 여정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아무튼 이래저래 모든 게 좋았다.


분명 한 번쯤 직접 눈으로 확인할 가치는 있지만 사실 그뿐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진짜 유럽의 삶이 더 궁금했다.


 레푸블리카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 피렌체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등의 명소를 향해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 시내를 지켜보던 중 문득 눈에 띄인 것은 문이 열린 헬스클럽이었다. 조명이 밝지 않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바벨을 들며 운동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유적의 고장 피렌체 사람들 역시 21세기 문명 사회를 살고 있으므로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후 나의 관심은 ‘중세’가 아닌 ‘현대’의 삶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행 시작부터 폭스바겐, 피아트, 르노, 푸조, 오펠, 스코다 등의 현지 자동차 브랜드를 유심히 관찰했고(현대 기아차는 어디에?) 국경을 넘으며 통신사가 보다폰(vodafone)에서 오렌지(orange)로 바뀌는 것도 경험하며 슬슬 유럽의 라이프 스타일이 궁금하던 차였다. 물론 메디치(Medici) 가문 사람들과 단테(Dante Alighieri)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남긴 중세의 유산은 실로 찬란하며 경이로웠지만 이미 커져버린 궁금함을 멈추지는 못했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스마트폰, 냉장고, TV, 세탁기는 어떤 브랜드를 쓸까? 우유나 과자, 냉동식품은 어떤 것을 먹을까? 식품과 생필품을 파는 대형 마트나 백화점은 어떻게 생겼을까? 대기업 본사같은 고층 건물들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시내 어디에 거주할까? 차가 제법 많은데 주차장이 별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도 자국의 언어로 노래하고 연기하는 연예인들이 있을텐데 그들은 누굴까? 시내의 식당과 카페는 한국처럼 프랜차이즈가 많을까 아니면 개인이 운영하는 매장 위주일까? 유럽엔 스포츠 강국이 즐비한데 축구장이나 농구 코트는 왜 이렇게 안 보이는 걸까?


사실 이렇게 많다. 다만 한국만큼이 아닐 뿐






 하지만 여행 중은 물론 귀국한 후에도 딱히 이런 궁금증들을 풀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유럽 현지로부터 겪은 경험담을 전해주는 사람들도 좀처럼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그 후로 해외 여행을 가지 못해 궁금증이 도질 때면 구글링으로 찾아보고 지도의 스트리트 뷰를 보는 것 정도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 만난 책이 바로 지금 소개할 ‘마케터의 여행법’(김석현 저)이다. 이 책은 구글링만으로도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유럽 역사나 유적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김투몽’이라는 필명으로 마케팅과 투자, 브랜딩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시야가 돋보이는 글을 써오던 저자는 바로 지금 유럽에서 어떤 먹거리, 공간, 콘텐츠가 대세인지 나아가 소비 문화 전반을 규정하고 이끌어가는 트렌드가 무엇인지를 낱낱이 리포팅한다. 신화적 환상에 기댄 “관광”의 대상이 아닌, 취향과 최신 트렌드가 살아 숨쉬는 넓은 무대로서의 유럽에 대한 설명을 원했던 나였으니 책과의 만남은 적절했던 셈이다. 책이 위에 언급한 모든 궁금증을 해소해주진 못했지만 적어도 유럽인들의 식생활과 그를 뒷받침하는 유통 브랜드 및 그 산업 전반에 대해서는 매우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현지의 유통 브랜드들은 유럽인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역사와 유적지를 공부하는 것도 좋고, 교통편과 숙박을 꼼꼼히 알아보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며 유럽 현지의 맛집을 검색하는 것도 쏠쏠한 즐거움이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일탈’도  현지의 ‘일상’을 잘 알고 이용할 수 있다면 더욱 즐겁고 편리할 것이다. ‘현대의 유럽’에 대해 자세히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단하게나마 공부하고 알아둔다면 다시금 자유로운 여행을 떠날 미래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독일의 국민 마트 알디(ALDI)



 작은 슈퍼마켓으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독일을 넘어 세계 최대의 유통 업체로 성장했다. 알디의 상속자들은 유럽 제1의 경제대국 독일에서도 (공식적인) 최고의 부호이다. 매장 수는 총 9000여 개에 달한다고 하니 적어도 독일 내에서는 가장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소매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을 넘어 미국과 호주 등 전세계로 진출해 있으며 미국의 슈퍼마켓 트레이드더스 조(Trader’s Joe)는 북알디 소유의 기업이다. 칼 알브레이트와 테오 알브레이트 형제가 1962년 창업했으며 이후 형인 칼이 북알디(ALDI Nord), 동생인 테오가 남알디(ALDI Süd)를 소유하며 회사를 분할했다.

 진열된 상품의 90% 가량이 자체 상품(PB)이다. 상품을 대량 구매하고 장기 계약하며 매장 규모가 무척 작고 품목이 적으며 고용 인력도 많지 않은데 이로 인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북알디와 남알디 모두 비상장기업이며, 모든 지분을 창업주 가문이 소유한 유한회사이다. 칼은 2016년, 테오는 2010년에 사망했으며 두 형제 모두 은둔하는 삶을 살았고 현재는 후계자들이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먹방과 쇼핑까지 이탈리아를 느끼는 공간 이딸리(Eataly)



이딸리는 이탈리아 식자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식료품점 겸 레스토랑이며 관련 서적과 이탈리아 와인도 접할 수 있는 종합 문화 공간이다. 조리가 쉽고 영양가 있으며 맛있기까지 한 이탈리아 요리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를 넘어 전세계로 진출해 30여개의 매장을 열었다. 최근 이딸리는 세계 최대의 소비 시장 미국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으며 뉴욕, 시카고, 보스턴, LA 등 대도시에 매장을 운영 중이거나 개점 예정이다. 파스타나 피자, 파니니 등의 이탈리아 요리가 미국에서도 대중화되어있다는 점에서 이딸리의 행보가 주목된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판교 현대백화점 식품관에 매장을 열어 화제가 되었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상징 이야마(IRMA)



1886년 개점한 덴마크의 프리미엄 슈퍼마켓으로 80여개의 점포 대부분이 코펜하겐(Copenhagen) 근처에 집중되어 있다. 코펜하겐은 유럽의 녹색수도로 선정될만큼 환경보호와 사회 전반의 지속가능성에 관심이 많은 도시인데, 자연히 먹거리도 제철에 생산되는 신선한 유기농 제품을 선호한다. 이런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이야마는 전세계에서 유기농 제품을 가장 많이 판매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식자재 폐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북유럽의 전통 조리법을 재해석하여 제철의 식자재로 요리한 뉴 노르딕 퀴진(New Nordic Cusine)은 덴마크 사회의 식문화를 이끌고 있는데 이런 흐름에 힘입어 이야마 역시 앞으로도 계속 번창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고의 럭셔리 백화점 봉 마르셰(Le Bon Marché)



 갈레리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 쁘렝땅(Printemps)에 비해 파리를 여행하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봉 마르셰는 세계 최고의 럭셔리 백화점이다. 루이뷔통으로 잘 알려진 LVMH 그룹의 유통 사업부에 속해 있으며 파리에서도 가장 부촌으로 여기지는 파리 7구(7E ARR)에 위치해 있다. 에펠탑을 설계한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이 설계했으며 개점 초기부터 파리의 호화 사교 살롱의 이미지를 표방했다. 에펠은 철골과 유리를 사용해 내부에 크리스탈 홀을 조성했으며 쇼윈도(Show Window)를 최초로 도입한 것도 봉마르셰이다.




봉마르셰를 더욱 특별하고 고급스럽게 만드는 것은 식품관인 ‘라 그랑드 에피세리 드 파리(La grande epicerie de Paris)’의 존재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식품과 식자재를 구매할 수 있으며 한국의 갤러리아 백화점의 고메이494, 청담 SSG푸드마켓 등 국내의 럭셔리 수퍼마켓은 모두 이 곳을 참고로 하여 탄생했다. 자연히 부와 교양 및 고급스러운 취향을 모두 갖춘 고객들이 주로 오가는데, 그랑드 에피세리에 근무하는 푸드 큐레이터들의 대다수가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명문대 출신들이며 LVMH 본사 역시 직원들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과 경험을 제공한다.



실용적인 네덜란드의 거울 알버트 하인(Albert Heijn)



 알버트 하인의 모기업 아홀드 델하이즈(Ahold Delhaize)는 2016년 네덜란드와 벨기에 최대 유통 기업 간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자국의 협소한 시장 규모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및 동유럽 국가들을 공략했고 현지 업체와의 조인트벤처를 시도하는 등의 전략으로 까르푸(프랑스)나 테스코(영국) 같은 대기업들과의 경쟁에서도 선전하고 있다. 이런 실용적인 경영방식은 지난 17세기 좁고 자원마저 부족한 국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양으로 진출했던 선조 네덜란드인들을 연상시킨다. 넓은 무대에서 활동하여 생존해 온 그들의 성공 방식은 세대를 뛰어넘는 자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알버트 하인에서 판매되고 남는 식재료는 업사이클링(upcycling, 버려지는 폐기물을 재조합하여 더 높은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되어 근처의 브런치 카페의 메뉴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이 매장은 업사이클링이라는 좋은 취지 뿐만 아니라 판매에서도 높은 수익을 올려 외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 ‘서양 문화’라고 함은 보통 미국의 라이프 스타일을 의미하며, ‘서양인’의 개념을 미국인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기실 미국은 유럽의 이민자들이 모여 이룬 나라이며, 모든 문화와 생활 인프라 및 가치관은 유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제국주의 시대의 각종 만행으로 제3세계에 말로 못할 피해를 끼치기도 했고 여전히 국제 사회에서 어줍잖은 기득권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유럽의 소비 문화 및 사상에 대한 배움과 관찰을 멈출 이유는 없다. 오늘날 지구촌 사람들이 숨쉬듯이 접하는 의식주와 교통, 통신, 예술, 금융 등 일상 생활과 거시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은 유럽에서 왔으며 적어도 지금 현재까지만 놓고 볼 때 서양 사회가 동양에 비해 물질 문명의 발전 및 그 폐해로 인한 시행 착오를 먼저 겪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삶에 대한 방향성도 유럽이 제시한 대안을 아시아나 제3세계가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유럽인들의 소비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접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자 공부가 될 수 있다.


 그 해 여름의 피렌체와 이탈리아는 맑은 하늘과 뜨거운 태양 및 아름다운 유적과 바다도 기억에 남았지만, 무엇보다 내 기억에 강하게 각인된 것은 그 좁은 문틈으로 보인 헬스클럽이었다. 우연히 접한 그 모습이 계기가 되어 더 넓은 세상이 어떻게 흘러왔는지뿐만 아니라 현재 어떤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공부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시금 자유롭게 멀리 떠날 수 있는 날이 오면 그 곳의 ‘오늘’과 ‘여기’의 모습을 보다 더 세심한 시선으로 많이 담아오고 싶다. 그 날 피렌체의 헬스클럽에 있던 사람들이 살아가는 진짜 유럽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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