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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Oct 25. 2020

‘골고루’는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불균형, 그 심각성에 대해

 지금은 로스쿨과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이라는 제도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지만, 10년 전만 해도 법조인이나 5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사법시험과 행정고등고시를 통과해야만 했다. 통칭하여 ‘고시’라 불렸던(엄밀히 말하면 사법시험은 자격시험이므로 고시가 아니지만) 이런 시험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대한 학습량과 높은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합격의 메리트를 앞세워 수많은 청춘들을 향해 ‘드루오라고’ 손짓했다. 특히나 5~7개 과목의 주관식 서술로 치러지는 2차 시험은 그야말로 책의 탈을 쓴 ‘벽돌’들과의 싸움이었다. 이해는 고사하고 암기하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철저한 준비 후에도 시험장에서 손이 떨어져나가라 적어야만 겨우 답안을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다른 여느 시험과 같이 고시의 2차 시험도 총점 순으로 합격이 결정된다(언론에는 보통 평균 점수로 보도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모든 시험 과목은 최소 40점 이상 득점해야 한다는 조건인데,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를 ‘과락’이라고 부르고 해당 수험생은 불합격처리된다. 예를 들어 해당년도 시험의 커트라인이 총점 200이라고 해도 모 수험생이 총점 210점에 단 한 과목이 38점이라면 과락으로 인해 불합격이다. 합격권의 실력인데 과락이 발생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험생마다 약점은 있는데다가 학습량과 난이도가 허술한 과목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충분한 실력을 보유하고도 안타깝게 불합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세월을 바쳐 준비하고도 과락으로 안타깝게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과거 15세기 말 콜럼버스(Columbus)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고 마젤란(Magellan)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며 소위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이후대외 무역과 식민지 정복을 통해 유럽의 경제와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의학과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라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항해 중에 수많은 선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 원인으로 크게 대두된 것 중 하나가 괴혈병이었는데, 비타민 C 섭취 부족이 그 주된 발병 원인이었다. 체내 세포나 조직의 형태를 유지시켜주는 콜라겐 합성에 관여하는 비타민 C가 없으면 장기 손상 및 혈관벽 약화로 이어지고 이로 인한 내출혈이 심해지면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괴혈병은 과일이나 채소를 적당히 챙겨먹기만 해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냉장 보관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선원들이 항해 도중에 비타민 C를 적정섭취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중요한 것은 단백질이나 지방, 탄수화물 등 다른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하더라도 비타민 C가 심각하게 결핍될 경우 괴혈병을 막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굶어죽는 것보다 더욱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사실 최종적으로 괴혈병의 원인이 파악된 것은 1930년대에 와서야 가능했다고 한다).


항해 도중 죽어나가는 선원들. 괴혈병은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각각 21세기의 대한민국과 근대 초반의 유럽에서 발생한 두 현상은 표면상 큰 관련이 없어보인다. 게다가 과락의 경우 공정하고 적절한 평가를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한 기준이고, 괴혈병은 그 자체로 신체의 안위에 영향을 주는 생리적 현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전체적인 과정의 충실함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비극이 총량의 부족함보다는 특정한 요소(원인)의 부족으로 인한 불균형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이나 상태를 달성하게 되면 삶의 다른 부분을 좀 희생하더라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기실 불만족이나 우울함의 원인은 불균형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는 마음의 병을 만들고 그로 인한 부정적인 생각은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린다. 이 때문에 삶에서 발생하는 각종 불균형을 마냥 가볍게만 보고 넘겨서는 안 된다.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충분히 안정되어 있으나 배우자나 연인이 없어 외로운 경우, 직무와 보수는 만족스럽지만 동료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경우,  오랜 시간 사업을 일구어 경제적인 안정을 이룩했으나 의미있는 추억을 만들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경우 등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워라밸’의 ‘밸’에 방점을 두고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도 그나마 이런 경우는 비교적 건전한(?) 불균형에 해당한다. 이미 무난하고 윤택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더 고가의 사치품,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 경쟁과 무관하게 남들보다 더 뛰어나보이고자 하는 맹목적인 욕구 등을 소유하거나 채우지 못해 안달하고 심지어 스스로를 질책하는 안타까운 모습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더 채우는 것은 그나마 균형있게 흘러가던 삶을 되려 불균형의 나락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



지혜로운 장동건으로 나이 들어갈 수 있다면  ‘ㅆㄴㅌ’만 타도 될 것 같다.


 


 무난히 살아가기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 균형이라니 자칫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심지어 장차 다가올 날에 건강이 많이 손상되고 기력이 쇠하며 거울 앞에서 세월을 모조리 도둑맞은 느낌을 받더라도 충분한 부를 쌓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생각도 슬며시 든다. 하지만 먹고 살만큼의 수입이 있다는 전제 하에 젊어보이는 외모와 탄탄한 신체를 소유하고 충분한 지혜로움을 쌓은 상태라면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의 삶도 완벽하진 않다. 돈이나 건강, 지혜로움은 그 자체를 그저 채워가기보다는 어떻게 배합하고 이용하느냐가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엇 하나를 심하게 소홀히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삶이라는 시험에서의 과락은 마음의 괴혈병으로 이어질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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