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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Nov 22. 2020

꿈의 구장 장충체육관을 가다

생애 첫 여자배구 직관 후기

결코 달갑지 않은 의미로 ‘특별한’ 2020년을 보내며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 중 하나는 현재의 당연함이 사실은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며 하루 아침에 흔적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여러 스포츠 종목 직관에 이제 막 재미를 붙여가던 지난 겨울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프로농구 직관을 다니는 재미에 푹 빠졌고, 조만간 프로배구도 보러 갈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고 자연히 다음 게임 심지어 다음 시즌에 보자고 느긋하게 미루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보러 갈 수 있고 내년도 내후년도 있는데 뭐하러 그리 서두르나 싶은 생각이었고 그땐 그게 너무 당연했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순진한 예측은 송두리째 망가졌고 무관중 경기가 진행되더니 결국 3월에 프로농구와 프로배구는 모두 시즌 종료라는 안타까운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사태를 지켜보며 다음 시즌에도 직관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가을 들어 새 시즌이 개막하는 시점에 맞춰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되고 소규모로나마 직관이 가능해진 것이 유난히 기뻤다.

 하지만 나 말고도 이런 날들을 기다렸던 이들은 많았고 예매 창이 열리는 순간부터 초집중해야만 표를 구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김연경의 복귀 등 호재에 힘입어 흥행에 성공 중인 여자배구, 특히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경기는 ‘예매 오픈 3분 후 매진’의 괴담이 돌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니 말이다. 경기 시작 3일 전 예매 창이 열린 후 곧바로 뛰어들었고 다행히 그리고 은혜롭게도 10분만에 간신히 표를 구할 수 있었다.











 춥다는 일기 예보와는 달리 오후 날씨는 포근했다. ‘목적지’는 장충체육관이지만 ‘경유지’에서의 즐거움도 소중한 법이라 넉넉히 시간을 두고 동대입구 역에 도착하여 이 동네의 명소 태극당으로 향했다. 몇 년만에 다시 와 본 이 곳은 ‘레트로’라는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와 조금씩 손을 맞잡고 있음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브랜드 리뉴얼의 매우 좋은 예라고 생각하며 더 세련되고 깨끗한 ‘옛것’이란 컨셉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더도 덜도 아닌 이만큼의 리브랜딩이 딱 좋다. 케익을 장식하고 있는 특유의 물결 모양 크림 토핑이 유난히 친근하다.그 와중에 입구에 새겨진 ‘‘혜자’라는 글귀는 이제 완전히 ‘국민 형용사’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여기까지 온 김에 커피보단 우유를 택했다. 생크림빵과 찹쌀떡은 비주얼과 포장 뿐만 아니라 맛도 옛것에 가까웠다.





간단히 배를 채운 후 천천히 체육관으로 향했다. 관중 입장이 가능한만큼 철저해진 방역 절차 탓에 예전에 비해 입장이 다소 지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기 시작까지 좀 시간이 있었지만 여유를 두고 걸어갔다. 동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장충체육관이다. 지하철역 출구 무렵부터 ‘소소 자매’가 떡하니 버티고 서서 환영(호객?)한다.왼쪽이 GS칼텍스의 이소영, 오른쪽이 강소휘다. 이름의 중간 글자를 따서 ‘소소 자매’로 불리며 두 선수 모두 국가대표로 인기가 많다.




체육관으로 올라오자 ‘본격 대형 배너’가 팬들을 반긴다. 주장 이소영(소영 선배?)이 센터에 위치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단체 프사’ 아래 시즌 홈경기 일정이 기재되어 있다. 짙은 녹색은 이제 GS칼텍스를 상징하는 Signature Colour로 자리잡았다.



경기장 내에서는 유니폼을 비롯한 각종 굿즈(Goods)를 만나볼 수 있다. 운동 용품 외에 마스크나 에어팟 케이스같은 생활용품도 눈에 띈다. 오늘의 방문팀을 배려하고 홍보하는 탓인지 IBK기업은행의 유니폼도 진열되어 있었다.



설레는 마음을 누르며 경기장에 입장하자 TV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화사하고 포근한 조명이 찬란히 빛나며 반겨주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조명은 경기장을 마치 뮤지컬 공연장처럼 화려하게 꾸며준다. 경기 시작 전이라 선수들은 몸을 풀고 있었다. 직접 와서 보니 역시 모든 것이 빠르고 생동감 넘친다.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힘이 넘치면서도 발레리나를 연상케 할만큼 유연하고 우아했다. 특히 스파이크가 내려꽂히는 각도는 거의 직각에 가까웠다. TV중계로 보던 그 비스듬한 궤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장내의 조명이 꺼지고 강한 비트의 리듬이 흐른다. 장내 아나운서는 역동적인 샤우팅으로 양팀 선수들을 호명한다. 미국프로농구(NBA)의 상징이었던 이 웅장한 경기 전 의식은 이제 국내 프로스포츠에서도 멋진 볼거리로 자리잡았다. 특이한 것은 농구의 경우 스타팅 멤버만 호명하는 데 반해 배구는 엔트리의 모든 선수들을 소개해 준다는 점이다.











 드디어 경기에 돌입했다. 살짝 맛만 보여주던 선수들은 본격적으로 코트를 누비기 시작했고 동시에 ‘눈호강’도 시작되었다. 볼의 흐름은 한층 더 빨라졌고 TV에서 보던 연타 서브조차 투수의 변화구나 호날두의 프리킥과 같은 마성의 궤적으로 날아갔다. 선수들은 공격과 수비에서 각자의 역할을 지정하느라 쉴새없이 대화했고, 양 팀 감독들도 코트에 바짝붙어 작전 지시에 여념이 없다.


2위 IBK기업은행과 3위 GS칼텍스의 경기인만큼 접전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경기는 예상과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장충체육관에 뿌리내린 견고한 팬덤의 영향으로 분위기 싸움에서도 우위를 점한 탓에 GS가 시종일관 경기를 주도했다.


 우선 IBK는 경기 내내 서브 리시브에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결국 이것이 총체적인 난국을 불러왔다. GS는 리시브가 불안한 IBK 선수들을 집중 공략했고 때문에 세터 조송화는 공격 자원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수비가 되지 않은 탓인지 표승주와 김주향 등 IBK의 윙스파이커들은 공격에서도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 국가대표인 외국인 선수 안나 라자레바도 평소만큼의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벤치 자원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던 김우재 감독의 경기 운영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적절한 교체는 단지 주전 선수들의 체력 보충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경기의 흐름을 바꿔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선수층이 얇거나 벤치 멤버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안고 있다거나 하는 속사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작전과 세부적 전술 구사에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었다. 이 날 IBK선수들의 경기 집중력이 다소 떨어져 보였는데 물론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지만 행여 심리적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올 시즌 조송화가 FA로 새로이 팀에 합류했는데, 배구에서 세터의 교체는 팀 차원에서 상당히 모험적인 투자이며 성과를 내는 데 시간도 필요하다. 적어도 이 날 경기만 놓고 보았을 때 아직 팀 전체적인 조직력이 완성되지 못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물론 그와는 별개로 조송화는 훌륭한 세터이다).


 반면 GS는 정확히 IBK와는 반대로 매우 순조롭게 경기를 풀어갔다. 선수들은 안정된 수비로부터 효율적인 공격을 이끌어냈고 차상현 감독은 거의 모든 엔트리를 기용하며 팀 전체의 경험치까지 높여버렸다. 그리고 팀 전술에 따른 세터 안혜진의 토스 덕분에 다소 느리지만 206cm라는 압도적인 높이를 보유한 외국인 선수 메레타 러츠는 본인의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상대 외국인 선수 라자레바가 신장만 더 작을 뿐(그래도 무려 190cm이다!) 스피드와 탄력, 공격 기술에서 전혀 뒤쳐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IBK 벤치의 활용 능력이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물론 러츠가 2년째 같은 팀에서 뛰고 있으며 인성 및 친화력이 매우 좋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22세의 젊은 공격수 유서연은 이제 팀에 있어 대체 불가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패기넘치게 강타를 내리꽂고 적극적인 태도로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면 신체조건만 뒷받침된다면 국가대표로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아쉽게도 유서연의 신장은 공격수로서는 매우 아쉬운 173cm이다). 팀의 원투펀치이자 국가대표인 이소영과 강소휘 모두 경기의 절반 정도만 출전했지만 그 공백을 전혀 느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팀 내부에서의 긍정적인 경쟁 구도를 만든다는 점에서도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결국 경기는 1시간 30여분만에 GS의 3대0 완승으로 끝났다. 물론 이제 겨우 5할 승률을 맞췄지만 올시즌 GS는 절대 강자 흥국생명에 맞설 유일한 팀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다(실제로 양팀은 지난 11월 11일에 2시간 반에 걸친 풀세트 진검 승부를 펼친 바 있다). 물론 이 경기에서 주전 선수들의 컨디션이 유난히 안 좋아보였을 뿐 IBK 역시 좋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아직 2위이기 때문에 향후 전망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귀가 후 저녁 뉴스를 보니 향후 ‘확진자 600명 발생설’ 등의 화두가 오르내리고 있었으며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 상승이 바짝 임박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오늘 직관을 다녀와서 정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교차했다. 개인적으로 유난히 어렵게 표를 구했기 때문에 가기 전에 ‘굳이 이 시기에 가야 하나’ 라며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거리 두기가 크게 강화되어 행여 무관중 경기라도 하게 되면 올시즌 직관은 물건너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개인 방역에 유의하며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전적으로 옳았다! 모르고 살았던 새롭고 흥미로운 세상을 본 희열은 여기에 들인 비용과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게 해주었으니 행여 발길을 돌렸더라면 얼마나 후회를 했을지 모를 일이다.


 생활고를 겪고 계신 많은 분들 앞에 감히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몇 번이나 혼란이 찾아왔다 진정되는지 일일이 기억하고 세어보기도 조금씩 지쳐간다. 세상의 많은 즐거움과 행복들이 이 예기치 못한 재난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고 다시 깨어날 날은 기약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곳곳에서 내일을 말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서울의 중앙부 남산 아래 장충에서도 마치 봄꽃이 환히 피어나듯 하얀 배구공이 창공을 가르며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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