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대첩’의 회상, 그리고 후회와 반성
국내 스포츠팬들에게 축구나 농구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핸드볼은 유럽을 대표하는 단체 구기 종목 중 하나이다. 서양에서 고안된 스포츠 종목이 그렇듯 세계 주요 강호들이 유럽 대륙에 몰려있다. 유럽 각국의 프로리그도 활성화되어 있으며 당연히 신체조건이나 규칙, 기술의 측면에서 서양인에게 유리하다. 이에 반해 국내 핸드볼은 남녀 공히 구단과 선수가 부족하고 리그를 운영하기 위한 각종 인프라가 부실하며 대중적 인기의 측면에서도 그 존재감이 미미하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이 팬들의 관심을 끌만한 유일한 기회일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 여자 핸드볼은 이런 불리한 여건을 비웃기라도 하듯 올림픽에서 1984년에서 2012년까지 무려 8회 연속 4강에 진출했으며, 1988년 서울과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를 2연패했고 그 외에도 은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획득하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줬다. 이 중 은메달을 획득했던 2004 아테네 올림픽의 이야기는 3년여 후인 2007년 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대중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주변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아니 굳이 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영화가 아닌 실화의 현장을 생생히 접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었다 한들 이미 온갖 만감이 교차했던 ‘스포’에 물든 내 기억이 유연하게 스토리에 반응할 것 같지도 않았다. 영화라는 방식의 ‘아카이브’가 아닌, 생중계 시청이라는 ‘속보’이자 ‘호외’를 목격했던 그 날의 이야기, 경기가 열렸던 그 날 그리스 아테네의 헬리니코 인도어 아레나로 잠시 돌아가보도록 하겠다.
무더위의 끝자락을 향하던 2004년 8월 29일 일요일, 당시 모종의 시험을 준비하던 나는 서울 모처 독서실에 있었다. 수험생 입장이었지만 ‘워라밸’은 추구하고 싶던 내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일요일 오후라는 프라임 타임은 다분히 낭만적이고 매혹적이었으며, 쉴 때가 됐으니 머리나 식히자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휴게실로 내려갔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바로 그 날 평생 잊지 못할 가슴 먹먹하며 거대하고 웅장한 역사의 한 장면을 볼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휴게실에 놓인 대형 TV모니터에 보인 것은 당시 대회 막바지를 향하던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이 곧 시작된다는 시그널이었다. 간간이 검색하던 뉴스를 통해 한국 대표팀이 결승에 올라갔음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상대는 북유럽의 강호 덴마크였다. 덴마크에서 핸드볼은 축구 못지 않은 거의 국민스포츠 수준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특히 덴마크 여자 핸드볼 리그는 한때 유럽 최고의 무대로 꼽히기도 했다. 여기에 첨언하면 덴마크인들의 조상은 바로 그 ‘어마무시한’ 바이킹이다.
흔히 바이킹이라 하면 노르만이라 불리는 노르웨이 및 스웨덴이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덴마크야말로 정통 바이킹의 후예이다. 과거 중세 시대 덴마크 바이킹이 브리튼 섬을 침공하여 약탈하기도 했는데, 이 때 영국에서는 이들을 데인(Dane) 민족이라 불렀고 이 이름이 오늘날의 덴마크(Danmark, 영어로는 Denmark)의 어원이 되었다.
오늘날 미디어와 여행 체험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바이킹 민족은 그들의 조상이 지니고 있었던 신체 조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서양인들 중에서도 장신에 강골이며 근력과 운동 신경도 우월하다. 그리고 이 점은 여성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날 코트를 누비던 덴마크 선수들 중 대다수는 180cm를 훌쩍 넘었으며 어지간한 남성 선수들 뺨칠 정도로 강인한 신체의 소유자들이었다. 반면 우리의 ‘태극 낭자’들은 한눈에 봐도 ‘여리여리’했으며 거대한 체격의 백인 선수들 옆에 서니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신체 조건만 놓고 보면 대학생 옆의 중학생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경기에 들어서자 한국 선수들은 단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용맹하게 맞섰다. 차라리 통나무나 타이어라고 해도 좋을 거대하고 탄탄한 상대 선수들의 신체에 망설임없이 부딪쳤으며, 장신의 수비수들이 순간적으로 보인 허점을 놓치지 않고 회심의 슛을 던져 적중시켰다. 돌진해 들어오는 공격수를 온 몸을 던져 막아내는 모습은 ‘육탄전’이라는 해묵은 용어의 의미를 온 몸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차디차고 딱딱한 플로어에 셀 수 없이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멍든 몸을 돌볼 틈도 없이 바로 일어나 달렸다.
경기 시작 전만 해도 대결 자체가 되겠나 싶어 우려하던 나는 어느새 경기에 완벽히 몰입하고 있었다. 휴게실의 소파를 점유한 사람들에 밀려 뒤에 서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까맣게 잊었으며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단지 스포츠 그 이상이었다. 승리에 목마른 전사들의 돌진, 창조를 위해 혼신을 내던진 예술가의 전력 투구, 아니 그 모든 것 이전에 생존을 향한 인간의 눈물겹도록 처절한 투쟁이 내 눈 앞에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파노라마처럼, 북극의 오로라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내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위에 아는 사람은 없었기에 주책맞다는 핀잔을 들을 일은 없었지만 설령 들었다 하더라도 전혀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시련 앞에 이렇게까지 강할 수 있음을,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 이토록 용맹할 수 있음을, 하나의 목표를 위해 철저히 뭉칠 수 있음을 나는 몰랐다. 정말로 몰랐더랬다.
잘 알려진 대로 양팀은 전후반 60분 및 1,2차 연장 20분까지 도합 80분의 혈투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승부던지기에 돌입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덴마크에 패해 우승을 내주고 만다. 이미 눈물을 쏙 빼서 그런지 아쉬움을 참지 못해 서럽게 우는 선수들을 보고도 무덤덤했다. 아니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선수들은 어떻겠는가? 4년의 세월을 오직 이 순간만을 보고 달리며 소중한 젊은 날들을 바치다 못해 갈아넣고도 정상의 바로 앞에서 물러서야만 하는 저들 앞에서 나는 울 수 조차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할 말을 잊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든 체험과 자극은 본인 생활에서의 발전과 성장을 일으켜야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 아무리 좋은 책과 체험, 조언도 나의 ‘개인적 버전’으로 개조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차원에서 그 날 이후 나의 태도와 행보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3시간에 걸쳐 그토록 생생하고 강렬한 교훈을 얻고도 말이다. 물론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독서실의 내 자리로 돌아가긴 했으나 그건 그저 결심의 색조가 옅은 ‘조건반사’ 차원의 행동에 불과했다. 내가 그 날 이후 진정으로 변하려고 했다면, 성장하고 싶었다면 그저 우직하고 순진한 생각으로 책상에 앉기 전 스스로에게 다음과 질문을 던지며 철저하고 진지하게 고민해 봤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연하게도 나는 하지 않았다.
과연 네 모든 것을 바쳐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조금 힘들고 귀찮다는 이유로 자주 주저앉고 있진 않은가?
경쟁자들이 두려워 지레 포기하려고 하는 건 아닌가?
생존을 위해 절박하고 필사적으로 매 순간에 임하고 있는가?
결국 2-3번의 시험에 응시했지만 좋은 결과가 있을리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부끄럽게도 그저 어려운 시험이니, 경쟁자가 많으니 그냥 안 되는 게 당연한 거라 맥없이 결과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렇게 무책임하고 순하기만 했던 나의 태도는 나 뿐만 아니라 뒷바라지하던 가족들도 힘들게 했고, 나아가 30대에 잡을 수 있었던 수많은 삶의 기회를 놓치는 원인이 되었다. 17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에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세상 만사는 결국 사람의 의지가 만들어 가는 것이며,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물론 예기치 못한 불운이 얼마든지 닥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게 실패의 원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2004년의 여름,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 선수들은 ‘아테네 대첩’을 통해 그 묵직하고 장엄한 교훈을 온 몸으로 시전해 주었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다시 한 번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펼쳐 보여준 그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삶의 순간, 성공과 실패를 떠나 용기내어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