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동물’ 김낙현이 바꿔가는 인천 전자랜드
치열한 승부 끝에 아쉽게 패한 쪽에 대해 찬사와 위로를 동시에 담아 건네는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 있다. 경기 종료 후에야 승패가 갈렸지만 어느 쪽이 이겼어도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경우, 지켜본 사람들은 승자에 대한 격한 환호를 약간 자제하게 되고 패자의 투혼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잘 싸운 것’과 ‘진 것’은 엄연히 별개이고 승리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이득과 명성은 승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졌잘싸’는 외부자들에겐 감동적이고 찬란한 추억일 수 있어도 당사자인 패자에겐 허무하고 서글픈 현실의 요약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시간이 갈수록 세상이 승자의 이야기만을 만들어내면서 패자의 아픔은 더 커져만 간다.
남자 프로농구 인천 전자랜드는 바로 그 ‘졌잘싸’라는 말에 가장 걸맞는 행보를 보여온 팀이다. 특급 스타플레이어는 없었지만 늘 상대방보다 한 발 더 뛰고 공수 모두에서 끈끈하고 단단한 팀워크를 보여주며 많은 명승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너무 이타적이다 보니 중요한 순간 특정 개인이 과감하게 나서기보다는 ‘내가 어떻게?’라는 겸손한 듯하나 소극적인 자세로 해결을 미루는 경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 때문인지 전자랜드는 늘 플레이오프에는 진출했으나 아직 우승 경력이 없다. 경기 막판 클러치 상황만 되면 약속이나 한 듯 외국인 선수들에게 해결을 떠넘기는 걸 보다 못한 유도훈 감독이 ‘다들 머리에 공 이고 떡 사세요 하냐!’며 뒷목을 잡았던 모습은 하나의 ‘밈’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https://youtu.be/txjE8zC_s8U
전자랜드는 인천 대우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프로 원년부터 참가한 이래 수차례 모기업이 바뀌고 인천이라는 연고지가 무색하게 부천에서 ‘객지 살이’를 한 경력도 있는 영욕의 역사를 겪어온 팀이다. 아쉽게도 올 시즌을 끝으로 전자랜드는 구단 운영을 중단하며 향후 구단을 후원할 모기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또한 현재의 연고지를 계속 유지할지도 미지수인지라 앞으로 인천에서 프로농구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비 오는 토요일 삼산월드체육관으로 향했다.
플레이오프 진출이 유력한 전자랜드와는 달리 상대팀 서울 SK는 정규리그만으로 이번 시즌을 마무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치열한 승부가 펼쳐졌고 1쿼터부터 양팀 합쳐 53점을 주고 받는 난타전이 이어졌다. 전자랜드는 가드 김낙현과 포워드 이대헌, 외국인 선수 모트리가 모두 20점 이상을 올리며 뜨거운 손맛을 보여줬고, SK도 ‘아크로바틱한’ 돌파를 보여준 가드 김선형과 탱크처럼 돌진해 골밑을 장악한 외국인 선수 자밀 워니를 앞세워 맞섰다. 하지만 결국 선수 전원이 고른 활약을 보여준 전자랜드가 시종일관 우위를 보이며 90대 82로 승리했다. 주전 포워드 정효근과 주장 정영삼이 모두 부상으로 빠진 핸디캡을 딛고 거둔 승리라 더 의미있었다.
https://youtu.be/Aul93jyLn3Y
이 경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으며 실제로 경기 MVP로도 선정된 선수는 전자랜드의 김낙현이었다. 이미 1-2년 전부터 김낙현은 공격력과 게임 리딩을 겸비한 리그 정상급 가드로 거듭나고 있으며 이날도 3점슛 6개를 꽂아넣으며 26점을 몰아쳤다(기술적인 분석을 곁들이면 강력한 하체 힘에서 나오는 그의 풀업 점퍼는 국내 최정상급이다). 이제 그 어느 팀에서도 김낙현은 요주의 대상이 되어 버렸으며 국가 대표 승선도 유력해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경기를 지켜보며 김낙현을 주목한 부분은 약간 다른 점에 있다. 김낙현은 개인보다는 팀을 앞세우고 차마 내가 주인공이 되리라 말하지 못하던 전자랜드에서 당당히 본인이 주연임을 외치고 있는 돌연변이이자 이단아와 같은 존재이다. 김낙현이 상대방에게 두려운 존재인 것은 꼭 오늘처럼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줘서만이 아니다. 언제든 솟구쳐 올라 본인이 해결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수비수와의 기싸움에서 우위를 점해 버린다. ‘내가 어때서!’라고 외치며 거침없이 던져대는 모습은 이대헌과 차바위, 전현우 등 동료들까지 일깨웠다. SK도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연승을 이어가려 했으나 모두가 육식동물 모드로로 변해 달려든 전자랜드를 제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늘의 모습이면 이 구단의 우승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김낙현의 군입대 전에 이루어야 할 텐데 그러기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단체에 대해 소속감을 갖고 헌신하며 한 구성원으로서 집단 공통의 미션에 힘을 보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업무에서 인간 관계에서 특정 문제를 홀로 해결해야만 하는 많은 순간을 맞이한다. 물론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고 그것을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의사 결정 및 그 뒤에 따르는 여러 과정을 무난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조용히 풀을 뜯어먹으며 주어진 상황에 적응만 하고 위기가 닥칠 때 물러서거나 주저하는 ‘초식동물’로만 살아갈 수는 없으며 내 먹거리를 적극 찾아나서고 목표물을 향해 달려드는 ‘육식동물’의 태도로 임해야만 보다 의미있는 성장과 발전이 가능하다.
전자랜드를 이끄는 젊은 리더 김낙현은 ‘사자의 심장’으로 동료들을 진두지휘하며 ‘내가 해결할테니 날 따르시오!’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유도훈 감독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 온 특유의 끈끈한 팀워크는 여전히 살아있다. 얼마 남지 않은 전자랜드의 도전이 ‘잘 싸워서 결국 이긴’ 결말로 끝을 맺고 ‘유도훈과 아이들’도 헤어지지 않고 새 둥지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농구팬의 한 사람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