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출전했고 이겼습니다
학교와 군대 및 관공서와 기업 등 각종 단체나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슬로건이며 조직은 ‘대승적 목표’의 달성을 위해 힘을 보탤 것을 모든 구성원들에게 역설한다. 하지만 정작 목표를 달성해가는 과정에서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경험이 풍부한 몇몇 구성원들 위주로 임무가 부과되고 수행된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실행하기는 커녕 ‘심부름’이나 ‘잡일’ 수준의 부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치며 명목상의 조직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특히 개인의 능력 차이가 두드러지는 스포츠에서는 에이스나 외국인 등 특정 선수에게 대놓고 공격 기회를 몰아주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속된 말로 ‘몰빵’이라고 불리는 이런 현상으로 인해 해당 종목 자체의 경쟁력이 쇠퇴했다는 평이 존재할 정도이다.
하지만 최근 끝난 여자 프로배구와 여자 프로농구에서 각각 우승을 차지한 서울 GS칼텍스 KIXX(이하 GS칼텍스)와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이하 삼성생명)은 그동안 프로스포츠의 우승 공식이라 불렸던 ‘몰빵’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당당히 정상에 섰다. 양 팀은 단순히 에이스에 대한 의존도만 줄인 것이 아니라 엔트리에 등록된 모든 선수들을 골고루 기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비중이 크지 않은 특정 경기에서뿐만 아니라 정규리그에서부터 플레이오프와 챔피언 결정전을 거치는 동안 이런 기조가 변함없었다는 사실이다.
GS칼텍스의 경우 3각 편대라 불리는 공격수 러츠, 이소영, 강소휘의 뒤를 받친 유서연, 세터 안혜진과 짐을 나눈 이원정 및 이현, 부상으로 하차한 주전 미들블로커 한수지의 공백을 훌륭히 채워준 문명화, 김유리, 권민지, 문지윤 여기에 수비를 분담한 리베로 한다혜와 한수진까지 그야말로 모든 선수가 ‘풀타임 5분 대기’ 모드로 본인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경기에 나서는 인원은 6명이지만 GS칼텍스의 가용인원은 주전 포함하여 14-15명에 달한다.
이렇게 모두가 소정의 출전기회를 받고 당당히 경기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히 서로를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도 각별하다. 지난 2월 초 선수 생활 최초로 수훈 선수로 선정되어 인터뷰를 하게 된 김유리를 위해 모든 선수들이 카메라 앞에 둘러앉아 이 모습을 지켜봤다. 인터뷰 도중 먼저 감정이 복받친 ‘유미 언니’ 한유미 해설위원을 따라 김유리가 눈물을 보이자 일부 선수들은 따라 울기도 하며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특히 당시 일부 선수들의 학교 폭력 연루 사건으로 여자배구 전체가 뒤숭숭했던 시점이라 이 날 김유리의 인터뷰와 GS칼텍스의 단합된 모습은 더욱 큰 감동을 남겼다.
https://youtu.be/Wn2i_EDw8Ww
삼성생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 언니들 김한별, 배혜윤, 김보미와 김단비, 윤예빈이 주로 주전으로 출장했지만 신이슬과 이명관, 이주연, 김한비 등이 수시로 출장해 신스틸러 역할을 했다. 특히 신이슬과 이명관은 파이널이라는 큰 무대에서도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팀내 세대교체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심지어 (빠른)2003년생 신인 조수아까지 투입될 때마다 제몫을 해냈다. 여기에 더해 시즌 중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박하나는 수술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벤치에 앉아 목이 터져라 언니와 동생들을 응원했다. 우승 이후 ‘언니들’은 “(박)하나가 초반에 대활약해 승수를 벌어준 덕분에 우리가 결국 우승할 수 있었다”며 동료의 헌신을 잊지 않고 챙기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GS칼텍스와 삼성생명이 모든 선수들에게 획일적으로 동일한 출전시간을 보장했거나 기계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도록 시킨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팀원이 각자의 능력과 경험에 맞는 책임을 부여받았다는 점이다. 주전들이 대부분의 ‘점유율’을 차지했지만 그 외의 선수들도 교체로 투입되어 본인 나름의 능력치를 최대한 발휘했다. 기량과 경험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의도적으로 배제시키는 ‘차별’은 없었고 이러한 코칭스태프의 뜻을 선수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팀의 전략이 옳았음은 각각 파이널 상대였던 흥국생명과 KB의 엔트리 기용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물론 흥국생명은 주전 공격수 이재영과 세터 이다영 쌍둥이 자매가 학교 폭력 논란으로 시즌 중 하차하는 타격이 있긴 했으나 보다 근본적 원인으로 평소 과도하게 주전 멤버에 의존했던 박미희 감독의 팀 운영방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KB의 안덕수 감독 역시 주전센터 박지수를 시즌내내 거의 풀타임 기용했고 신인 및 백업 멤버의 활용을 도외시했다. 박지수가 몸싸움으로 인한 체력 소모가 심한 센터이고 강아정, 염윤아, 최희진은 모두 30세를 넘은 베테랑이라는 점에서 안 감독의 엔트리 활용은 크게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우승을 달성하면서 GS칼텍스의 차상현 감독과 삼성생명의 임근배 감독이 거쳐온 길과 그들의 리더십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차상현 감독은 전임 이선구 감독 시절부터 코치로 재직하며 선수들과 오랜 인연을 만들어왔으며 2016년 부임 이후 한 시즌에 한 계단씩 올라가 첫 시즌 5위에서 올해 우승까지 이룬 거짓말같은 기적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임근배 감독 역시 남자 프로농구 현대모비스에서 코치로서 유재학 감독을 보좌하며 충분한 경험을 쌓았고 삼성생명에 감독으로 부임해서도 6시즌째 팀을 이끌고 있으며 지난 시즌 최하위의 수모를 극복하고 정상에 올랐다. 차 감독은 평소 강도높은 훈련을 주문하지만 그 외 시간엔 선수들과 격의없이 지내는 것으로 유명하며, 임 감독은 주장 배혜윤이 ‘감독님의 리더십이 옳았음을 우리의 우승으로 증명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선수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
https://youtu.be/Q52p7rShEQg
차상현 감독은 훈련 때는 ‘차노스’라 불릴 정도로 엄격하지만 그 외의 시간엔 기꺼이 아빠,삼촌, 오빠의 대역을 자처한다. 수시로 선수들의 놀림감이 되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을 정도이다.
https://youtu.be/ZgDyJ_prnRY
우승의 순간 임근배 감독은 주저없이 선수들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평소에 임 감독이 얼마나 선수들을 존중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 이 대목에서 많은 농구팬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zation)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스로는 물론이고 타인으로부터 존재감을 인정받길 원한다. 개중에는 과도한 욕심을 부리며 능력 이상의 무엇을 가지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기여만큼의 대우를 받으면 만족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조연으로서로라도 참여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면 인정 결핍으로 힘들어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2021년 봄 GS칼텍스와 삼성생명은 참여라는 촉매를 통해 만들어진 팀워크로 한 시즌 동안의 험하고도 위대한 여정을 함께한 모두의 존재감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라는 구호는 영혼 없이 박제된 교훈을 넘어 살아 숨쉬는 진실한 명언이 되었다. 그동안 찬란한 결과에 비해 가슴 찡한 과정의 스토리가 다소 부족했던 한국 프로스포츠에 두 구단이 선사한 감동은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다. 우승과 함께 울려퍼지는 퀸(Queen)의 노래 ‘We Are the Champion’처럼 진정 ‘우리 모두가 ‘주식회사 주인공’의 최소 지분이라도 소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순간이 우리 삶 속에서도 많아지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