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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화소년 Mar 28. 2021

음악 선생님의 ‘스웩’ 넘치는 유산

명작으로 시작하고 끝났던 고2 음악 시간

 고3의 본격적인 입시 전쟁으로 돌입하는 ‘던전’ 앞에 있었던 고2 12월의 어느 날 오후 우리 반은 음악 수업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음악 과목은 수능에서 제외됨은 물론 3학년 중간/기말 고사에서도 자취를 감출 예정이기에 수업 진행은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 선배들의 경험담도 자습을 했다는(실은 잤다는)‘리뷰’ 일색이었기에 우리도 응당 그렇게 시간을 보내려나 싶었다.


 하지만 음악 선생님은 입시에서 홀대받을지언정 자신의 과목에 대한 당당한 자부심이 있던 분이셨고, 한 해 동안 진행된 수업에서 그 열정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때마침 그 해 우리는 가창 실기 시험으로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숭어’(Die Forelle)와 이탈리아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Torna a Sorrento)를 무려 ‘원어로’(!) 노래했으며, 그 외에도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의 아리아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의 민요 ‘오 나의 태양’(O sole mio) 등 클래식의 주요 히트 넘버들을 배웠다. 비록 수능 시험과 무관했지만 그것이 명곡의 클래스를 퇴색시킬 이유는 되지 못했고 ‘긴급 모드’인 3학년도 아니었기에 우리는 상대적으로 여유와 호기심이 있는 상황에서 그 곡들을 접할 수 있었다.


https://youtu.be/NF9DrUXowBo

따라 부르다 보면 정말 거울같은 강물에 송어가 보이는 듯 했다


https://youtu.be/wbdM7yuNGYI

파바로티(Pavarotti)가 부르는 나폴리 민요라니 이것이야말로 ‘국룰’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과 수업이자 ‘정규 방송’에서 배운 곡들이었을 뿐 음악 선생님이 준비한 회심의 한 방은 따로 있었다. 이제 음악 시간도 끝이구나 싶었던 12월 한 해 동안 근사한 클래식의 세계를 안내해 주셨던 선생님이 이번에는 불멸의 팝 히트 넘버를 들고 오신 것이다. 친구들 모두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지만 특히 내겐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뜻한 방에서 배를 깔고 당시 발매되었던 일명 ‘팝송 대백과’를 뒤적이는 것이 나의 ‘최애 취미생활’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과 영화의 OST등으로도 많은 곡을 듣고 알게 되었지만 팝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데는 그 ‘벽돌책’만한 것이 없었다.


여러분 이제 3학년 되면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하니까 이런 좋은 노래 찾아 들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선생님이 소개해 주려고 해요. 공부하느라 힘들겠지만 가끔 이런 좋은 곡 들으며 머리 식히고 나중에 대학 가면 더 많은 노래 들으며 즐겼으면 좋겠어요


특유의 차분하고 여유있는 어조로 말씀하신 후 선생님은 우리에게 인쇄물을 건네셨다. 펼쳐 보니 아는 아티스트의 곡이었지만 음원으로 들어보진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몰랐던 것도 잠시 선생님의 친절하고 능숙한 안내 하에 조금씩 곡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알게 되었지만 모두 찬란한 ‘클라쓰’의 불후의 명곡이었다. 무려 바브라 스트레이전드(Barbra Streisand)의 ‘Memory’와 퀸(Queen)의 ‘Love of my life’의 가사와 악보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https://youtu.be/MWoQW-b6Ph8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곡은 뮤지컬 ‘캣츠’(Cats)의 OST로 더 유명하다. 캣츠는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Thomas Sterans Eliot)의 연작시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를 대본으로 하여 극작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er)가 작곡한 세계 4대 뮤지컬 넘버 중 하나이다. 뮤지컬에서는 찬란하고 행복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대장 고양이 그리자벨라(Grizabella)의 테마송으로 불려졌다. 바브라 스트레이전드는 특유의 청아한 음색으로 어서 이 어둠이 가고 지난날의 행복이 다시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노래한다.


https://youtu.be/qca9FVCb9nw


퀸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75년 발표된 곡이다. 이전 연인 메리 오스틴(Mary Austin)을 생각하며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미 상처주고 떠나버린 옛사랑을 못잊어 그리워하는 마음이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4옥타브를 넘나드는 천상의 목소리를 빌려 흐른다. 하지만 질척거리는 집착이나 슬픔에 절규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절제되고 유려한 애절함,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담은 조용한 흐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복잡미묘한 안타까운 감정을 프레디 머큐리는 본인의 경험으로부터 되살려 부른다.







세월은 흘렀고 세상의 온갖 노래를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도 왔다. 예전처럼 음반을 직접 소유하거나 음원을 ‘불법 복제’할 이유도 없다. 알고 있었던 곡은 물론이고 아예 몰랐거나 들어는 봤는데 제목을 몰랐던 곡들까지 귀가 심심할 틈이 없는 세상이다. 위에 언급한 바브라 스트레이전드와 퀸의 다른 히트 넘버들을 진즉에 다 ‘섭렵’한 것은 물론이다. 모든 음원을 너무 쉽게 구할 수 있다 보니 오늘은 어떤 컨셉의 뮤직 리스트를 만들까 하는 배부른 고민을 하게 될 정도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편리해질수록 다소 불편하고 서툴렀으며 모든 것이 새로웠던 처음의 날들이 더 애틋하고 풋풋하게 느껴진다. 지금이야 나름의 문화적 취향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데 있어 별다른 애로 사항이 없지만 그 날의 수업이 없었더라면 결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 날 선생님의 가르침은 다소 서툴게 홀로 헤매던 나의 음악세계를 본격적으로 넓히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관심을 확장하고 그 매력에 빠지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특히 취향이라는 것이 확장 이상으로 초기 형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날 배웠던 두 곡 및 나아가 고2에 접했던 모든 클래식 넘버들은 나의 좋은 ‘문화 자산’이었음을 새삼 느낀다.


 가끔은 당시 선생님께서  우리의 문화 생활과 교양 습득을 위해서만 그런 이벤트를 기획하진 않으셨을 거란 추측도  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선생님은 본인의 고급스럽고 세련된(혹은 본인께서 그렇다고 믿는) 취향을 무언중에 표현하고 싶으셨던  하다. 조금 재미있게 말하면 ‘내가 지금은 시골 학교에서 너희들한테 음악을 가르치고 있지만  이런 것도 알고 감상할  아는 여자란다라는 일종의 과시나 스웩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한가. 그날 선생님 덕분에 더 커진 문화적 호기심은 지금껏 살아오며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풀어가고 넓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문화적 소양은 소위 말하는 ‘스펙’ 못지않게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할 때, 타인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때, 세상사의 흐름과 유행을 파악할 때, 독서하거나 여행을 떠날 때 등 거의 모든 경우에 필요하더라는. 그런 점에서 비록 이 글을 보긴 어려우실지라도 음악 선생님께 감사를 담은 인사 한 마디를 전하려고 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신지 아직도 교직에 계신지 궁금합니다. 그때의 선생님보다 지금 제 나이가 더 많아졌지만 그날 주신 가르침은 제 학창시절에 샘물같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꾸준히 여러 곡들을 듣고 나름 공부한 덕에 지금은 어디가도 이 쪽으로는 좀 한다는 소리를 듣는답니다 ㅋㅋ 소중한 문화적 자산을 남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럴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만나뵙게 된다면 근사한 카페에서 차 한 잔 하며 음악에 관한 가르침도 더 받고 약소하게나마 대담도 나누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삶도 부디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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