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엣의 레전드 호세 카레라스&사라 브라이트만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이 대립하던 냉전(Cold War) 시대의 끝무렵에 개최된 대회로 북한과 쿠바 등을 제외한 160여개국이 참여하며 전세계의 화해의 시대를 예고했다. 그리고 이후 정말로 냉전 시대가 종식되며 세계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89년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고 소련의 영향 하에 있던 동유럽 공산국가들에서는 정권 교체가 단행된다. 1990년 가을에는 독일이 통일되었고, 이어 소련 치하에 있던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된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는 자연히 스포츠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서울 대회 이후 치러진 1992년 바르셀로나(Barcelona) 대회는 냉전 종식 후 개최되는 첫 올림픽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발트 3국(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을 제외한 구 소련 연방국들이 합쳐진 ‘단일 팀(Unified Team)’, 통일된 독일, 유고에서 떨어져 나온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등이 올림픽에 참여한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참가국도 169개국으로 서울 대회에 비해 소폭 늘어났다.
개최국 스페인으로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었던 대회였다. 사상 첫 올림픽 개최였으며 20세기 중반 프랑코(Franco) 독재의 ‘흑역사’를 딛고 전세계에 과거 대항해 시대의 위용을 다시금 확인시킬 좋은 기회였다. 또한 카스티야(Castilla) 지방의 수도 마드리드(Madrid)가 아닌 카탈루냐(Catalunya) 지방의 바르셀로나(Barcelona)를 개최지로 낙점함으로써 양측의 고질적인 갈등이 완화될 것이란 기대도 조성되었다. 그렇게 7월 25일 바르셀로나의 몬주익(Montjuïc) 올림픽 경기장에 활로 쏘아올린 성화가 타오르며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몬주익 경기장은 황영조가 남자 마라톤 금메달을 따낸 장소로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하다).
https://youtu.be/gmRf41SVHS4
서울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전세계의 화합을 표현한 노랫말과 한국인 그룹 코리아나의 열창으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역대급 주제가로 기억되고 있다. 4년 후 바르셀로나에서도 올림픽 정신과 세계의 평화를 ‘영원한 친구’(Amigos Para Siempre)라는 타이틀 하에 노래한 주제가가 울려 퍼졌다.
‘국뽕’의 심정을 잠시 배제하고 말하자면 주제가를 부른 두 가수의 유명세 및 브랜드 가치는 서울 올림픽의 코리아나보다 훨씬 높았다. 바로 세계 3대 테너 중 한 사람인 호세 카레라스(José Carreras)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히로인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이었는데, 8월 9일 폐막식에서 두 사람이 보여준 멋진 하모니는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명장면으로 남아있다(카레라스의 경우 바르셀로나 태생이라 이 곡과 무대가 더욱 뜻깊었다).
https://youtu.be/OmUS9vu-O1s
당시만 해도 젊었고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두 스타는 5분에 약간 못미치는 공연 내내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관객 및 시청자들을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한 소절씩 번갈아가며 노래하더니 친구일지 연인일지 모를 능숙하고도 부드러운 터치로 상대방과 교감하며 손을 맞잡는다. 그윽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우정, 신뢰, 사랑, 설레임, 기대, 존중 등 온갖 감정 표현이 담겨 있으며, 두 사람은 묵직하고도 포근한 신사와 우아하고도 발랄한 숙녀가 어떻게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온몸으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듀엣의 교과서요 레전드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무대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공연 문화에서 소위 ‘무대 매너’라는 개념을 체감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퍼포먼스는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자연스럽고도 유려하게 표현한 가사 역시 돋보이는데 영어 가사의 일부를 사심을 담아 번역하여 아래에 공개한다. 스페인어(카스티야어) Amigos Para Siempre및 그의 카탈루냐어 표현인 Amics Per Sempre가 후렴구마다 포함되어 조화를 더하는데 작사자는 얄궂게도 바로 사라 브라이트만의 전 남편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er)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군요. 당신은 내 모든 기분을 공감하고 있으며 마치 우린 오랫동안 알아온 듯 해요.
당신은 내 눈빛만 보고도 내가 겪은 세상사의 아픔을 알아채네요.
우리는 영원한 친구이며 끝나지 않을 사랑을 나눌 거에요.
우리가 설령 헤어지더라도 당신은 내 곁에 있는 듯 하군요.
당신이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따뜻해진답니다
이후로도 6번의 올림픽이 더 열렸으며 올 7월에는 코로나 19로 1년 연기된 올림픽이 일본 도쿄에서 열린다. 그 동안에도 올림픽에선 많은 명승부와 영웅들이 탄생했으며 이를 지켜본 전세계의 팬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비록 많은 스포츠 종목들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상업화되었지만 여전히 전세계의 많은 선수들과 팬들에게 올림픽은 출전하고 싶고 관람하고 싶은 꿈의 무대이다. 그리고 올림픽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행사들 역시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와 연출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기획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언제부터인가 가슴뛰는 감동을 선사하는 주제곡은 나오지 않고 있다. 물론 올림픽에서도 다양한 볼거리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지만 명작 영화에 OST가 빠져있는 듯한 아쉬움은 지우기 힘들다. 감동은 연출하는 것만큼이나 지속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르셀로나를 수놓았던 우정의 세레나데가 새삼 그립다. 일단 이 시국에 무사히 개최하는 것이 관건이겠지만 올 여름 도쿄에서는 이 시대의 낭만과 희망을 표현한 멋진 주제가를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