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곡 다른 느낌, Sara Perche Ti Amo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진학 무렵의 10대 초반은 아직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날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나만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고 또 그것을 인정받고 싶은 시기이다. 과거에는 ‘사춘기’, 요즘에는 ‘중2병’이라 명명되는 청소년기 초반의 열병으로 인해 들뜨고 마음 상하며 심지어는 방황하기도 하지만 크게 엇나가지 않는 이상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흉터가 아물고 ‘성장’이라는 이름의 뿌듯한 선물을 받아들며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13살 소녀 샤를로트는 딱히 부족하지도 풍요롭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속내는 어떨지 몰라도 딱히 애정표현 같은 건 하지 않는 무뚝뚝한 아빠, 여러 가지를 도와주고 보살펴주지만 잔소리 심한 가정부 아주머니(샤를로트는 엄마가 없다), 자신을 언니처럼 따르는 동네 꼬마 룰루와 부대끼고 때로는 티격태격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샤를로트는 자신과 동갑이지만 이미 예술가로 유명세를 얻은 피아니스트 클라라를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이 자신과는 다르고 특별하며 찬란해 보이는 클라라를 동경하게 된 샤를로트는 클라라와 가까워지려고 애쓰고 그녀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한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여러 가지 일이 있은 후 샤를로트는 있는그대로의 나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마음 속에서 클라라의 공간을 조금씩 지워낸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당당해지는 미묘한 미션을 무사히 완수하며 샤를로트는 한 발짝만큼 성장한다.
1985년에 발표된 프랑스 영화 ‘귀여운 반항아’(원제 : L'effrontée)는 이제 막 성장기에 들어선 13세 소녀의 심리에 대한 감각적이고 탁월한 묘사가 돋보인 작품이다. 주인공의 감정과 정신세계를 존중하면서도 다소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결말을 택해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균형을 잡았다. 주인공 배역을 맡은 여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는 당시 자신의 나이와 같은 극중 인물을 자연스럽게 소화했고 이 작품을 계기로 훗날 성인 배우로도 다양한 커리어를 쌓게 된다(한 가지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을 꼽자면 원제 L’effrontée의 정확한 뜻과 상황 설정으로 볼 때 ‘당돌한 그녀’ 정도의 번역이 더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는 당시에 크게 흥행한 것은 아니었고 추억의 명화로 두고두고 재방영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화가 남긴 다른 유산 덕에 지금껏 사람들의 추억 속에 머물고 있는데 바로 이탈리아 밴드 리키 에 포베리(Richi E Poveri)가 부른 OST ‘Sara Perche Ti Amo’(널 사랑하기 때문이야)이다. 여성 보컬 안젤라 브람바티(Angela Brambati)의 소녀를 방불케 하는 깜찍하고도 재기발랄한 제스처가 동반된 통통 튀고 청아한 목소리를 듣다 보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덩달아 마음도 포근해진다. 영화 내내 다른 음악은 거의 없이 이 한 곡만 주로 흘러나왔지만 주인공의 수줍고도 설레는 마음을 잘 표현했는데다가 극중 공간적 배경인 남프랑스의 눈부시게 화창한 햇살과도 잘 어울려 작품 전체를 커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 곡은 국내의 여러 CF와 예능 및 유럽 축구 소개 프로그램 등에서 BGM으로도 많이 사용되어 이탈리아어 가사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사람들의 귀에도 익숙하다.
https://youtu.be/h9ozyZkI064
남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남부 이탈리아도 맑은 하늘과 찬란한 태양으로 상징되는 포근한 기후의 땅이다. 또한 사람들은 낙천적인 성향에 감정 표현이 풍부하며 끊임없이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그에 걸맞게 이 곡 전체를 관통하는 감성도 전형적인 남부 이탈리아 쪽에 가깝다(다만 밴드의 모든 멤버들은 북부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중해 감성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이 곡의 색다른 버전을 발견했는데 썸네일부터 남달랐다. 바로 그 유명한 축구팀 AC밀란(AC Milan, Associazione Calcio Milan, 이하 밀란)의 배너였는데 처음에는 다소 의아했다. 밀라노라면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 도시인데 그 밀라노의 ‘상징’ 밀란이 이 노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솔직히 영상을 보기 전에는 남성적 색채가 짙은 축구라는 스포츠 및 열광적이다 못해 다혈질인 이탈리아 축구팬들이 각인시킨 다소 거친 이미지 때문에 명랑하고 활기찬 원곡의 느낌을 훼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참고로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로서의 역사가 160여년에 불과하며 아직도 예전 도시 국가 시절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도시마다 지역색이 강하다. 또한 북부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유럽 전체를 통틀어서도 부유하지만 남부 이탈리아는 도시와 시골을 막론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지역 갈등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전체의 사회 문제가 되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4분의 영상은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렇게 색다르고도 매력적으로 재해석했을 줄은 몰랐다. 종달새의 지저귐을 연상케 하는 동요 같았던 원곡은 ‘밀란 버전’에서 밀란이 지난날 걸어온 힘찬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행진곡으로 멋지게 재탄생했다.
https://youtu.be/hzUdNIOYMJc
하지만 이 영상이 정말 뜨거운 감동과 짜릿한 기쁨을 안긴 이유는 밀란을 거쳐간 이탈리아와 전세계의 스타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유럽 축구의 ‘탑 티어’에서 살짝 밀려나 있지만 예전의 밀란은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 못지 않은 슈퍼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영광의 날들을 보냈다. 그 찬란한 화보를 아래에 펼쳐 본다.
밀란의 애칭은 ‘로소네리’(Rossoneri)인데 ‘빨강(Rosso)+검정(Neri)’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한국 프로야구의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으로 유명했던 ‘검빨’ 유니폼은 이탈리아에서 먼저 존재했던 것이다.
유럽 축구 클럽들의 최고 영예는 단연 챔피언스리그(UEFA Champions League, 이하 챔스) 우승이다. 사진은 2007년 5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챔스 결승전에서 잉글랜드의 리버풀을 꺾고 우승한 밀란의 모습이다. 아쉽게도 이를 마지막으로 밀란은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아래에서도 이 날의 기억은 여러 번 등장한다.
온갖 부정 부패와 성추문 등으로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지만 그와 밀란을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4차례나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밀란의 구단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왼쪽)와 과거 밀란의 감독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유럽 명문 구단을 지도했던 파비오 카펠로(Fabio Capello). 유니폼의 킷스폰서 로또(Lotto)의 로고가 이 사진의 배경이 1990년대 초중반임을 말해준다.
안드리 셰브첸코(Андрі́й Шевче́нко )는 밀란에 입단하자마자 세리에A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2006년 첼시 이적 후 쇠락기에 접어들었지만 밀란에서 세브첸코는 득점왕, 리그 우승, 챔스 우승, 발롱도르(Ballon d’Or) 등 축구 선수로서 모든 것을 이뤘다. 그에게도 밀란에게도 그 시절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여러 나라의 선수들이 오가는 유럽 프로리그이지만 한 나라의 스타 여러 명을 한 구단이 동시에 보유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런데 약 30여년 전 밀란에서는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 오렌지 3총사로 불리는 네덜란드 국가대표 3인방 뤼트 휠리트(Ruud Gullit, 왼쪽), 판 바스턴(Marco Van Basten, 가운데) , 프랑크 레이카르트(Frank Rijkaard, 오른쪽)는 잠시였지만 모두 밀란의 검빨 유니폼을 입은 바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네덜란드는 유로 1988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강팀이었고 이 세 명 역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이었다.
열성 축구팬이라면 아니 축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 투샷을 보고 뭉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탈리아를 넘어 전세계 축구의 전설이었던 두 스타가 맞잡은 두 손 너머로 상대에 대한 우정과 신뢰 그리고 존경이 느껴진다. 아주리(Azzuri, 이탈리아 국가대표 유니폼을 칭함)의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와 로소네리의 파올로 말디니(Paolo Maldini)는 이 짧은 조우에서도 눈빛만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리라
말디니라는 전설이 앞에 있었고 다소 거친 행보로 논란을 만들기도 했지만 젠나로 가투소(Gennaro Gattuso, 왼쪽)역시 밀란의 심장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수염이 없어 다소 앳되어 보이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zlatan ibrahimovic)와 함께한 모습.
‘호날두’(Ronaldo) 이전에 ‘호나우두’(Ronaldo)가 있었다. 비록 전성기가 지난 시점이기는 했지만 우리의 ‘호돈신’도 잠시 밀란의 유니폼을 입은 바 있다.
로베르토 바조 역시 2년간 밀란의 일원이었다. 바조의 오른쪽으로 당시 유벤투스 소속이던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의 모습도 보인다(참고로 바조는 유벤투스에서도 5년이나 뛰었다)
아테네의 영광을 만들었던 리버풀과의 2007년 챔스 결승 안드레아 피를로(Andrea Pirlo)의 프리킥 골 장면. 이 우승으로 밀란은 2년 전 이스탄불에서 리버풀에게 당했던 패배를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2007 챔스 우승 이후 밀라노 두오모 광장을 가득 매운 팬들. 밀란의 우승만큼 이들을 기쁘게 하는 건 없다.
포르투갈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두 영웅 후이 코스타(Rui Costa)와 루이스 피구(Luis Figo). 당시 피구가 뛰던 레알 마드리드는 전세계 최고의 스타들을 보유하며 지구방위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하지만 코스타도 밀란에서 2003년 챔스 우승을 달성하며 전성기를 보내던 시점이었다.
마리오 발로텔리(Mario Balotelli)는 역대급의 재능과 신체조건을 보유했지만 잠재력을 제대로 터뜨리지 못하고 여러 구단을 전전했다(물론 모두 명문 구단이었지만). 왼쪽 옆에 등돌린 스페인 국가대표 공격수 디에고 코스타(Diego Costa)의 모습도 보인다.
수많은 전설들이 밀란을 거쳐갔지만 그 중 대표는 단연 말디니이다. 그리고 2021년 현재 시점에서 밀란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점은 이미 여러 번 등장했지만 역시 2007년 챔스 우승이다. 빅 이어(Big Ear, 챔스 우승 트로피의 별칭)를 들고 환호하는 말디니로 상징되는 역대 최고의 순간은 그렇게 15년째 재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