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과도 콜롬비아도 아닌 파나마 운하가 된 이유
2021년 3월 23일 파나마 선적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EVER GIVEN)호가 이집트의 수에즈(Suez) 운하 내에서 좌초되어 운하가 6일간 양방향 통제되었다. 에버 기븐호는 말레이시아에서 출발하여 3월 31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수에즈 운하 남측 입구에서 약 6km 북상한 중간에서 선수와 선미가 대각선으로 수로 전체를 막으며 좌초하였다. 비록 3월 29일 상황이 종료되긴 했으나 인양 이후 대기 중이던 선박이 모두 지나가고 다시 운하가 정상화되려면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정부 및 민간 운항사의 손해가 수백억 달러를 넘길 전망이라 책임 소재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해당 선박의 조선사에 책임을 넘기는 것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번 사고의 후유증은 수에즈 운하가 세계 무역에 얼마나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보여준다. 운하가 막히면 아프리카 남쪽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우회하여 1만 km에 달하는 거리를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더 가야 하기 떄문이다. 수에즈 운하는 1869년 개통된 이래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며 세계의 생활권이 단축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지금도 수많은 선박이 이 곳을 통과하며 지구를 먹여살리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번 사고를 유발한 에버 기븐호는 파나마 국적선인데, 파나마에도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80여km에 달하는 파나마 운하(Panama Canal)가 있다. ‘형님’ 수에즈 운하 역시 프랑스와 영국, 이집트 사이에서 말 많은 사연을 만들며 착공 10년만인 1869년에 완공되었지만 파나마 운하의 ‘탄생 설화’에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속사정이 자리하고 있다. 파나마 운하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이해 관계자의 입장과 의견이 엇갈렸고 완공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세기 말엽인 1880년 철도와 정유, 전기 등의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2차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미국은 국내를 넘어 해양 진출로 눈을 돌리게 된다. 당초 미국은 지리적으로 더 가깝고 내륙에 넓은 호수를 보유한 니카라과에 운하를 건설하려 했으나 1873년의 경제 위기로 사업을 중단한 바가 있었다. 유럽의 활동 반경을 비약적으로 넓힌 수에즈 운하의 영향력을 실감하던 당시 상황에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자는 구상은 국내 여론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은 운하 건설이라는 대역사(大役事)를 해낸 경험이 없는데다가 천문학적인 건설 비용 문제도 있어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파나마 운하 사업에 적극 투자하고 운하 회사의 주식을 발행한 곳은 셀리그먼(Seligman) 은행이었는데 당시 셀리그먼 가문의 장문인인 제시 셀리그먼(Jesse Seligman)이 업무 추진을 진두지휘했다. 셀리그먼 가문은 역시 미국의 금융재벌인 잭스, 모건 가문과 공동으로 파나마 운하 회사의 주식 인수단을 결성했고, 이들은 미국과 프랑스 양국에서 주식을 발행하고 판매했다. 이들의 활약으로 주식 발행은 당초 추산치를 훨씬 웃도는 자금을 조성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셀리그먼 가문은 파나마 운하 건설이 이슈가 되기 직전 세상을 떠난 독일 출신의 요제프 셀리그먼(Joseph Seligman)이 미국으로 이민온 후 일으킨 금융 재벌 가문이다. 잡화상으로 시작해 큰 돈을 벌었으며 자본을 축적한 후에는 금융에 진출했고 유럽을 호령하던 금융가문 로스차일드(Rothschild)와도 협력 관계를 맺는 등 미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도가였다
하지만 운하 준공 이후 프랑스 정부가 관리하기로 한 약정이 문제였다. 미국 내 여론은 유럽 세력을 끌어들이고 미국의 이익을 팔아먹었다며 사업을 주도한 셀리그먼 가문을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제시 셀리그먼은 “파나마 운하 건설은 전적으로 민간 프로젝트이며 공사에 필요한 기계와 설비는 모두 미국 제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사업은 미국에도 이익이 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여론을 진정시킨다. 곧이어 수에즈 운하 건설에 견인차 역할을 한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가 파나마 운하 회사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자금 조달과 운하 건설은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된다.
레셉스의 진두 지휘 하에 현장에 프랑스 엔지니어들과 공사팀이 투입되었고 이들은 현지 탐사를 통해 약 7년이면 공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 여론도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 개통 경험이 있었기에 파나마 운하도 문제없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운하와 바다의 수위 차이로 인해 당초 계획에 없었던 갑문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문제로 시간을 허비한 탓에 9년이 지나도록 운하는 절반도 완공되지 못했다. 게다가 사고 및 질병으로 사망하는 인부들이 무려 2만 2천 명이나 되면서 프랑스도 4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를 보고 물러났으며 책임자인 레셉스는 해고된다(결국 레셉스는 이때의 막대한 빚으로 인해 파산하고 늘그막에 정신이상까지 일으킨 후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국가적 손해를 야기하고 실패한 사업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미국 의회는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조사 결과 셀리그먼과 모건 등 은행 가문들은 주식 인수를 통해 거액을 챙긴 것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제시 셀리그먼은 친분있는 인사들을 운하 건설 과정에 개입시키며 거액의 연봉을 지급했고, 공사에 필요한 설비와 관련해 납품업자들과 부당한 거래를 한 사실도 밝혀졌다. 다행히(?) 유력 인사들의 로비에 힘입어 셀리그먼 가문은 여론의 비난을 피했고 의회 조사에서도 무혐의로 밝혀지며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미국 의회는 니카라과 운하 사업을 재개하라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셀리그먼 가문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었던 제시 셀리그먼은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인 건설 기술자 필립 부노바리야(Philippe Bunau-Varilla)를 만난다. 이전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던 부노바리야에게 제시 셀리그먼이 언급한 거액의 보상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에 부노바리야는 흔쾌히 미국으로 건너와 전국을 돌며 파나마 운하 건설의 타당성을 필사적으로 역설한다.
마침 이 시기 무렵인 1902년 사건의 전개 방향이 달라지는 계기가 발생하는데 서인도 제도의 세인트 빈센트 섬에서 화산 폭발로 수천 명이 사망한 대참사가 그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부노바리야는 니카라과에는 화산이 있으나 파나마에는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고 니카라과에 운하를 건설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는 주장을 의회에 밀어붙이듯 전달한다. 결국 의회에서도 방향을 선회하여 파나마 운하 계획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모든 것이 제시와 부노바리야의 뜻대로 되어가나 싶던 순간에 콜롬비아 정부의 방해라는 장애물이 나타난다. 당시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한 지역에 불과했기 때문에 콜롬비아 정부를 설득하지 못하면 운하 건설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칠 것이 없었던 제시와 부노바리야는 돈으로 파나마 민족주의자들을 매수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파나마의 보호를 약속받는 등의 물밑 작업을 거쳐 파나마를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시켜 버렸다. 이후 미국의 주도로 운하 건설이 재개되고 착공 34년만인 1914년 드디어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다. 이전의 금융 재벌 가문들이 그러했듯 셀리그먼 가문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방식으로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그리고 부노바리야는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파나마 주재 미국 초대 대사로 부임한다.
운하의 소유권과 관리권을 보유한 미국은 무역과 해군 작전 등에서 많은 이익을 누렸고 파나마 운하 주변 땅을 점유하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 운하 개통 이후 지속적으로 미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파나마 주민들은 적극 저항했고 결국 미국은 1977년 파나마 운하 조약을 맺으며 파나마 운하 지역 반환을 결정한다. 이후 1979년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파나마 측에 반환했으나 파나마인들은 운하 자체를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결국 미국은 1999년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을 맺어 파나마인들의 요구를 수용한다. 2016년에는 최초 완공 102년만에 확장 개통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운하로 인해 파나마가 얻는 수입은 비용을 제하고도 우리돈 약 1조 8천억원에 달하는데 이는 파나마 정부의 재정 규모를 고려하면 매우 큰 돈이다. 그런 점에서 파나마인들은 지구 온난화를 더욱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 북극항로가 개통되면 파나마 운하는 수요 면에서 큰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운하의 건설은 전적으로 미국과 금권 재벌의 이익을 위해서 강행되었지만 이로 인해 오늘날의 파나마라는 국가가 탄생했으며 수많은 선박들이 운하를 통과하며 파나마를 먹여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얄궂음을 엿볼 수 있다.
출처 및 참고 : 쑹훙빙 저 ‘화폐전쟁’ 2권, 나무위키 ‘파나마 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