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나폴레옹의 최후의 몸짓
1815년 2월 28일 오후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약혼 피로연을 치르던 항해사 에드몽 당테스(Edmond Dantès)는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게 체포된다. 항해 도중 사망한 선장의 명에 따라 이탈리아의 엘바 섬(Isola d’Elba)에 들러 그 곳에 유배되어 있던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의 부하 장수에게 소포를 전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평소 당테스를 시기하던 동료 선원 당글라르(Danglars)는 항해 도중 이를 알게 되고 도착 후 당테스가 ‘보나파르트 당원’이라고 조작하여 밀고한다. 사건을 담당한 검사 제라르 드 빌포르(Gérard de Villefort)는 처음에는 당테스를 석방하려 했으나 그 소포의 수신인이 과거 ‘보나파르트 당원’이었던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 후 입장을 바꿔 당테스를 근처 바다의 이프 성채에 가둬 버린다(빌포르는 왕당파 명문가의 딸과 혼인을 앞두고 있었다). 최고 중죄수인 정치범으로 분류된 당테스의 수감 생활은 이후 무려 14년이나 이어진다.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 사연은 ‘다행히도’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가 19세기 중반에 발행한 소설 ‘몬테크리스토”(Le Comte de Monte Cristo)의 일부이다. 하지만 비슷한 일이 현실에서 얼마든지 가능했을 정도로 나폴레옹은 당시 프랑스에서 금기어였다. 엘바 섬에 갇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현지의 집권 세력인 부르봉 왕가 및 그 추종세력인 왕당파들에게 언제 재기할지 모르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에 왕당파 세력들은 나폴레옹의 세력 확장과 관련된 지극히 미약한 조짐조차도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탄압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나파르트 당원’으로 분류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파멸로 몰아넣고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수도 있었던 최악의 주홍글씨를 온 몸에 새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소설 속 당테스와는 달리 얼마 후 나폴레옹의 시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나폴레옹은 예전의 그 황제가 아니었고 그가 반란을 통해 이루려 했던 꿈은 좌절되고 만다. 소위 ‘100일 천하’라는 말로 기억되고 있지만 당시 주변 여건과 정세를 돌아보면 100일이나 버틴 것도 행운일 정도로 그의 마지막은 초라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시기부터 황제 즉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을 통해 유럽을 거의 접수하다시피 했고 수많은 국가들을 프랑스의 세력권 하에 두었다. 하지만 영국에게는 1805년 트라팔가(Trafalgar) 해전에서 패하는 등 유독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에 프랑스는 경제 재재를 통해서라도 영국을 견제하려고 했으며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 이른바 .’대륙 봉쇄령’을 내려 영국과의 교류를 억제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접수하다시피 하며 맹위를 떨치고 있던 1811년경,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지만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영국 봉쇄령을 대폭 완화하고 영국과의 무역을 일부 재개한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당장 러시아 정벌을 결정하고 러시아 역시 30만의 적지 않은 병력을 앞세워 맞선다. 결국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향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하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눈 덮인 알프스를 통과했었고 이집트의 사막에서도 싸워본 나폴레옹은 러시아도 문제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하 30도 아래로 내려가는 러시아의 추위 및 다른 유럽 국가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크고 황폐한 영토에서 오는 악조건은 나폴레옹이 이제껏 경험한 바와는 차원이 달랐다. 기나긴 행군을 거쳐 모스크바에 입성했을 때는 이미 질병과 탈영, 부상 그리고 각종 소모전으로 인해 병력은 10만여명으로 크게 줄어있었다. 게다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모스크바 도심을 모두 불태운 후 철수해 버렸다. 정면 대결을 피하는 대신 물자와 식량의 보급을 끊어 ‘말려 죽이겠다는’ 의도였고 나폴레옹은 여기에 저항할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사태를 파악한 나폴레옹은 사력을 다해 1812년 11월에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와 함께 귀환한 병력은 고작 4만명도 되지 않았다.
허약해진 나폴레옹은 숨돌릴 틈도 없이 영국과 러시아를 필두로 한 수많은 유럽 국가들 - 에스파냐, 포르투갈, 프로이센, 스웨덴 등 - 의 침략을 받게 되고 결국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동맹국들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814년 3월 동맹국들은 파리를 점령했고 이후 체결된 퐁텐블로 조약(Traité de Fontainebleau)에 의해 나폴레옹은 황제에서 물러나고 이탈리아의 엘바 섬으로 유배된다. 다만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을 범죄자로 취급하진 않았으며 엘바 공국의 대공 작위를 부여하고 200만 프랑의 연금 지급을 약속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르며 부르봉 왕가가 부활했다. 그렇게 나폴레옹은 영원히 프랑스와 유럽으로부터 잊혀지는 듯 했다. 소설 ‘몬테 크리스토’에서 당테스가 체포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또 그럴만한 능력도 있었다. 또한 정부가 당초 약속한 연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루이 18세에 대한 국민 여론도 좋지 않다는 소식도 전해듣게 된다. 결국 1815년 3월 초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호위 무사’들의 경호를 받으며 당당히 파리에 입성하고 순식간에 정규군과 시민군을 합쳐 30여만명의 병력까지 보유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다시금 황제의 전성시대가 시작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훗날 시점에서 보면 그것은 최후를 맞기 직전의 마지막 절규에 불과했다.
일시적으로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부르봉 왕가의 힘은 만만치 않았고 민중들도 나폴레옹 황제와 부르봉 왕실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게다가 이미 유럽 주변국들은 나폴레옹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자신있게 프랑스와의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이 상황에서 나폴레옹이 택할 수 있는 옵션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본인의 건재를 과시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815년 6월 지금은 벨기에 영토가 된 워털루(Waterloo) 평원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는 웰링턴(Wellington)이 이끄는 영국군과 운명의 ‘단두대 매치’를 벌이게 된다. 예전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나폴레옹을 한 차례 물리친 바 있는 강적 웰링턴을 상대로 나폴레옹은 분전 끝에 거의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막판 개입한 프로이센(Preussen) 군대의 지원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의 ‘대장’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지난 1806년 아우스터리츠(Austerliz) 전투의 패배로 독일 땅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이 붕괴된 데 대한 복수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나폴레옹은 이번에는 정말로 ‘업계’에서 퇴출되고 강제 은퇴하게 된다.
파리에 돌아온 패장 나폴레옹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고 결국 1815년 6월 22일 황제에서 폐위된다. 이 와중에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영국은 이를 봉쇄하고 나폴레옹의 신변에 대한 권한을 압수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파리에서 무려 약 9천 km나 떨어진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머나먼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6년 후 영욕의 삶을 마감한다. 나폴레옹은 독재자이기도 했지만 그의 치하에서 시민사회의 도래가 앞당겨진 것 역시 사실이다. 1830년의 7월 혁명과 1848년의 2월 혁명을 거치며 프랑스의 절대 왕정은 그 존재감이 한층 퇴색했고 입헌 군주제를 거쳐 공화정이 도래했다(물론 루이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를 자칭하긴 하지만).
쓸쓸히 죽어간 현실의 나폴레옹과 달리 소설 속의 당테스는 14년 후인 1829년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해 몬테 크리스토 섬의 금은보화를 팔아 억만장자가 되고 세계 각지를 여행한 후 1838년 프랑스로 돌아와 본인이 계획했던 복수극을 실행해 나간다. 그리고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 되어 7월 혁명 이후 자유주의 사조가 거세던 파리 사교계를 천문학적인 재력과 탁월한 교양을 앞세워 접수하며 신화를 만든다. 복수를 끝낸 후엔 운명의 여인 하이데와 함께 영원한 행복을 찾아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한편 현실의 영국 런던에서는 워털루 전투를 기회로 삼아 국제 금융의 맹주가 탄생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출신의 유대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의 3남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는 압도적인 정보력을 이용해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했다는 결과를 미리 알아내고 영국 국채를 투매한 후 다시 헐값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한다. 당시 영란은행(BOE, Bank of England)의 화폐 발행은 국채와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의 최대 채권자가 되었다는 것은 로스차일드가 곧 영국의 화폐 발행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 시스템은 훗날 미국 연방준비위원회(FRB)에도 이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및 참고
원종우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유럽편”
알렉상드르 뒤마 ‘몬테 크리스토’
쑹훙빙 ‘화폐전쟁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