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의 파리, 그 빛과 그림자
프랑스 파리의 면적은 약 105k㎡ 로 서울의 약 6분의 1 정도이지만 거주 인구는 220여만명으로 서울의 20%를 상회한다. 다시 말해 파리의 인구 밀도는 포화 상태에 이른 서울보다도 더 높다. 게다가 파리는 건축물에 대한 고도 제한 규정 때문에 수많은 인구의 주거나 기업의 업무를 위한 공간을 제공할 고층 건물이 거의 없다. 몽파르나스 타워(Tour Montparnasse) 정도를 제외하면 현대식 초고층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다(도시 서쪽의 신시가지인 라데팡스(La Défense)에는 초고층 건물이 많다). 하지만 이런 조건 하에서도 시민들은 주거지와 일터를 무난히 오가며 살고 있고 각종 문화생활도 부족함없이 향유한다. 물론 국내에서는 수도이며 국제적으로도 브랜드 가치가 높은 도시이기에 자본과 일자리가 모이고 각종 문화와 예술 활동이 융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생활 전반이 편리하도록 이루어진 도시계획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이나 에펠탑(Tour Eiffel)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잘 정비된 선형과 방사형 구조의 건물과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리는 1000년 이상 프랑스의 수도였지만 근대 초반까지만 해도 늪과 습지 일색이었다. 산업 혁명이 진행되던 19세기 초 도시 인구는 급증했으나 시민들을 위한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는 전혀 갖춰지지 못한 상태였다. 계획없이 진행된 난개발에 파리의 뒷골목은 말할 수 없이 어지럽고 불결했으며 1832년에는 콜레라가 발생하여 수많은 시민이 사망하기도 했다. 경악스럽게도 도심 슬럼가의 인구밀도는 ㎢당 약 10만명으로 오늘날 파리 시내의 평균 인구밀도 ㎢당 약 2만명보다 훨씬 높았다.
그런 파리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세기 중반이 되어서부터이다. 나폴레옹 황제 시대이던 1850년대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이 주도한 도시 계획의 영향 덕분에 파리는 전세계의 관광객이 모여들고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라는 찬란한 칭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프랑스 사회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이 와중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 시절의 향수를 잊지 못한 시민들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며 제2공화정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3년 후 그는 친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에 오르며 제2제정시대를 열었다.
당시의 유럽 도시들은 상하수도의 건설, 도로의 구획, 주거와 상업 지구의 분리, 공원의 조성 등 오늘날의 도시라면 응당 갖추고 있는 기본적인 시스템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황제 즉위 전인 1841년 프랑스는 파리 재개발법을 만들었으나 자금이 부족했고 각종 이해 관계를 조정하지 못해 사업은 조금도 진행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나폴레옹 3세는 파리를 위생적이고 교통이 편리하여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현대적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이 무렵인 1853년 오스만이 센(Seine) 강 감독관 후보로 나폴레옹 3세에게 천거되고 황제는 도시 계획을 실현할 책임자로 오스만을 선임한다. 매사에 꼼꼼하고 빈틈이 없었으며 영리하고 원기 왕성하기까지 했던 오스만에 의해 중세에 머물러 있던 파리는 청결하고 질서정연한 곳으로 거듭날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파리 개조사업은 리볼리 거리(Rue de Rivoli)에서 생앙투안 거리(Rue Saint-Antoine)까지의 동서축과 스트라스부르 거리(Boulevard de Strasbourg)에서 세바스토폴 거리(Boulevard de Sébastopol)까지의 남북축이 만나는 교차로인 그랑드 크루아제 드 파리(Grande Croisee Paris)를 필두로 시작되었다. 시테 섬(Île de la Cité)의 노트르담 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주변의 오래된 건물이 철거되었고 근처에 살던 주민들은 이주했다(사실은 이주를 빙자한 추방에 가까웠다). 개선문(Arc de Troimphe)의 회전교차로는 무려 12방향으로 뻗어나가며 도시 곳곳을 연결했으며 새로 조성된 거리들은 철도역과 연결되었고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았던 골목들은 말끔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낡은 주택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들도 철거되었다. 중세 시대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의 정착촌이 있었던 몽소(monceau)라 불리는 수많은 언덕들은 도시 평탄화 작업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마레(Marais) 구역의 생쟈크 드 라 부슈리 (Saint-Jacques de la Boucherie) 성당과 생 제르베(Saint-Gervais) 성당 정도이다.
급진적인 도시 재건축 사업에 많은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오스만은 전혀 굴하지 않고 기술 관료 특유의 냉정함으로 밀어붙였다. 본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파리는 극심한 악취와 해로운 먼지로 물든 재래식 도시였고 그런 점에서 위생적이고 현대적인 도시를 만들겠다는 그의 갈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스만이 주도한 많은 도시 정비 사업 중 최고의 정수로는 단연 하수도 설비 개선이 꼽힌다. 청결해진 것은 물론이고 지상의 직선형 시가도만큼이나 정교하게 정비된 하수도관과 지하 갱도는 사람은 물론이고 선박까지 통행할 수 있을만큼 넓어졌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에서 장 발장이 총상을 입은 마리우스를 들쳐업고 갔던 구정물이 턱까지 차오르는 1830년대의 하수도에 비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의 변화요 개선이었다.
기본적인 위생이 해결되면 휴식처 및 문화생활 공간이 필요하다. 나폴레옹 3세는 런던을 롤모델로 하여 시민들의 나들이 공간을 조성할 것을 명했고 이에 오스만은 4개의 공원과 24개의 광장을 새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60만 그루의 나무가 심어졌고 18k㎡ 의 공터가 사용되었다. 질서 정연하고 청결하게 새단장을 마친 파리에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855년 만국 박람회에 맟춰 개장한 그랑 오뗄 뒤 루브르(Grand Hôtel du Louvre)를 필두로 호화 숙박업소가 잇따라 개장했고 고급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리는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e)도 이 시기에 생겼다.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파리 오페라 하우스도 1870년대 중반에 개장했다. 대로변에 호화로운 카페들도 자리잡았다. 런던의 커피 하우스가 증권 거래소와 보험회사의 탄생에 기여했다면 파리의 카페는 수많은 문호와 예술가들을 결집시켜 토론의 장을 제공하고 각종 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1830년 영국 리버풀에서 처음 개통된 철도는 19세기 중후반을 거치며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확장되었고 각종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국가 및 도시 간 이동이 용이해짐에 따라 관광산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파리에도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1855년부터 1889년까지 파리는 무려 4번의 만국박람회를 개최했고 이 과정에서 파리를 방문한 관광객의 누계는 5000만명이 넘는다. 성수기엔 파리 시민보다 관광객이 많은 경우가 흔했고 도시 중심부는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한 식당과 숙박 업소로 가득찼다.
이후 1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파리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쇼핑과 관광의 명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리에 대한 환상을 품은 사람들이 막상 파리를 방문한 후 현대적 기준으로는 매우 불결한 도시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 실망하는 ‘파리 증후군’이라는 현상이 있을 정도로 아직도 파리는 전세계 여행객들의 로망이다.
인간의 모든 역사가 그렇듯 오스만의 도시 계획에도 업적 뒤에 가려진 흠결이 존재한다. 오스만이 사업을 진행한 17년 동안 새로 들어선 건물들은 대부분 5층 이하로 형태와 구조가 똑같았으며 신축 빌딩의 1층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섰고 위로는 부자들이 거주했다. 그 결과 지금도 파리 시내의 거의 모든 건물은 ‘주상복합 아파트’이다. 이에 따라 파리 도심엔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거주지와 상업 시설이 남았는데 이는 빈민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가옥 2만5,000동이 헐린 데 대한 반대 급부였다. 오스만은 본인이 즐겨 사용한 알맹이 도려내기, 길 내기, 중심가 찢기와 같은 표현처럼 멀쩡한 건물도 본인이 지도에 그은 직선에 따라 해체해 버렸다. 시인 샤를 발레트(Charles Valette)는 오스만을 ‘잔인한 파괴자’라 부르며 비난했고 마르크스(Karl Marx)는 오스만이 관광객을 위해 도시의 역사를 지워버렸다고 일갈했다.
게다가 오스만은 거액의 자금을 사용하며 정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오스만은 프랑스 정부와 파리 시의 명의로 거액의 채권을 발행해 이 중 일부만 공사에 투입하고 나머지는 대출금 이자를 갚으며 여러 공사를 동시에 진행했다. 또한 ‘위임 채권’이라는 이름을 붙여 민간업체에 채권으로 대금을 지급했다. 사실상 ‘외상’으로 공사를 한 것이다. 오스만이 이렇게 끌어다 쓴 돈은 약 25억 프랑인데 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1858년 정부 예산이 18억 5천 프랑이었으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정부가 당시의 부채를 20세기 초반에야 갚았을 정도였다.
오스만의 파리 개발은 1960년대 이후 서울의 오늘을 만든 강남 개발을 떠올리게 한다. 두 사업 모두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업고 이루어졌으며 개발 과정에서 고급 백화점과 호텔, 넓은 도로, 공원, 미술관 등의 문화 시설 등이 들어서며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모습으로 도시가 변모했다. 또한 이면에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온갖 뒷이야기가 만들어졌으며, 평생 살아온 주거지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사람들이 빈민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의 룰에 ‘충실하게도’ 사회의 빈부 격차를 심화시킨 것도 비슷한 모습이다.
현대의 편리한 삶을 가능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지난날의 모든 과오를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덮어서는 곤란하며 미래의 개선을 위한 시금석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에 와서 그것에 대한 성토로 일관하는 태도 역시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다. 두 사례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인간이 걸어온 역사란 본질적으로 영광과 환희만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는 가르침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지나간 역사를 미화할 것도 왜곡할 것도 없이 그 민낯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그만큼 차분하고 세심하게 오늘의 모습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이 장차 우리 삶의 번영과 정신 건강에도 더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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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및 출처
벤 윌슨(Ben Wilson) 저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http://naver.me/xVldt9Vv
권홍우 ‘질병과 혁명, 공포의 산물···파리 재개발’ (서울신문 2017.05.03)
https://www.sedaily.com/NewsView/1OFS2HF23R/GG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