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머무는 곳
빠르게 지나가는 도시들 속에서 가끔은 시간이 머무는 곳을 만나게 된다. 파나마는 내게 그런 도시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 자리 잡은 파나마는 홍수환선수의 4전 5기 신화를 만들었던 곳, 파나마 운하가 있는 곳, 게이샤라는 유명한 커피의 원산지 정도로 인식되었지만, 실상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름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싱가포르를 떠올리게 할 만큼 화려하고 번쩍이는 마천루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려했던 도심의 풍경은 오래 기억에 남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붙잡은 것은 그 빌딩 숲 뒤편, 몇 걸음만 옮기면 마주하게 되는 전혀 다른 시간의 풍경이었다.
구 시가지의 첫인상
빌딩숲 뒤편으로 펼쳐지는 구 시가지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화려함 대신 삶의 냄새가 먼저 다가온다. 벽은 갈라져 있고,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으며, 발코니에는 빨래가 바람에 흔들린다.
그 사이로 누군가의 저녁 식사 냄새와 라디오 소리가 스며들며, 여행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조금 느리게, 그리고 조금 더 따뜻하게 흐르고 있었다.
햇살 아래의 발코니
발코니에는 길게 늘어진 빨래가 걸려 있었다. 파란 바지, 빨간 셔츠, 흰 티셔츠가 햇볕에 바래며 바람에 천천히 흔들린다. 그 사이에 놓인 작은 화분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한 일상이 함께 하고 있었다.
도시의 번쩍이는 풍경 뒤에서도 삶은 이렇게 묵묵하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느린 거리
오래된 벽 앞에 택시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서 있다. 반짝이지도, 새것 같지도 않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거리의 일부가 되어 있다. 카메라에 담긴 사진은 한계가 있었기에 눈으로 더 오래 남겨야 할 것 같은 의무감마저 생겼다.
도시의 속도와는 다른 시간 속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속도가 이곳에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창문에 걸린 시간
건물의 창문에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걸려 있었다. 어떤 창에는 세탁물이, 어떤 창에는 화분이, 어떤 창에는 바람만 드나들고 있지만, 오랜 시간 이곳을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 이야기로 남아서 벽과 창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다. 화려하고 멋진 빌딩숲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간의 결이 이곳에는 남아 있었다.
여행은 결국 다른 사람의 일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상 속에서 내가 얼마나 빠르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조용히 돌아보게 된다.
파나마의 구 시가지는 '조금 느리게 살아도 괜찮지 않겠냐'라고 나지막한 질문을 남기고 있었다.
그 질문은 여행이 끝난 지금까지도 내 안에 머물러 있다.
결국, 여행의 즐거움은 계획된 장소에 도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 내가 그곳에 남아있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