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흘러가더라도

by 서한나

"아쉽지 않으세요?"

하나도 아쉽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이다. 왜 아쉽지 않았겠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여러 핑계를 대며 그냥 그만두고 싶었던 것 같다. 질문한 A에게 말했다. 그때는 다시 직장인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리고 지금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고.


공단 강의가 있는 날. 오랜만에 본업이다. 사실 이젠 본업이라고 말하기엔 할애하는 시간이 적다. 경험만 있을 뿐이다. 출산 전 본업이다. 출산한지 삼 년째. 임신으로 퇴사할 때, 애초에 직장인을 다시 하는 것은 마음 접었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없었고. 퇴사를 결심할 그때에도, 주변에 만류 있었다. 석사 졸업도 하고, 대표직도 맡고 있고,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직장 생활하면서 자기 계발하기 시작했다. 독서, 마케팅, 글쓰기, 시간관리 등 여러 가지 배우면서, 막연하게 직업재활을 그만두는 때가 오겠거니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임신하면서 퇴사를 결정한 때인 거다.

퇴사를 했어도, 했던 일이 끝나지는 않았다. 직장 생활만 끝났을 뿐. 이전부터 해오던 강의나 자문 위원, 컨설턴트 업무 등은 의뢰가 오면 했다. 안 할 이유가 없다. 단지 소속이 문제였다. 그전에는 직장인이었으니 상관없었다. 퇴사한 순간부터는 소속이 없으니, 인건비 계산에 문제가 됐다.

글쓰기 코치로 수업을 준비하면서 안 그래도 사업자가 필요했다. 겸사겸사 사업자를 냈다. 당연히 직업재활 느낌은 뺐다. 장기적으로 그걸 할 게 아니니까. 게다가 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강의 의뢰가 올리는 없다. 기존에 연결된 곳과는 알음알음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마저도 담당자가 바뀌거나 하면 연결이 끊어지기도 하니. 그것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다. 퇴사 시점부터 삼 년 생각했다. 그 정도 이어갔으면 오래 한 거라고. 애초에 퇴사하면서 다른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한 마당이라. 자기 계발에 더 포커스가 된 이름으로 지었다.

내가 사업자를 낸 것을 보고 B가 전화 왔다. 직업재활 느낌이 약하다고. 직관적이지 않아서 앞으로 할 수 있겠냐면서. 자기네 기관 이름으로 활동하라 했다. 제안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전화를 끊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직업재활과 관련된 일하고 있다. 퇴사 이후로 달라진 점은 내 생각이다. 늘 이번이 마지막 직업재활 강의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끊길 수 있으니까. 오늘 강의 장에 갈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이후에도 계획된 일정 더 있지만. 중요치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임하는 것뿐이다.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두 번 버스를 갈아타고 공단 앞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횡단보도를 찾았다. 공단은 반대편이라. 버스정류장을 두고 양쪽으로 있었다. 한쪽 길은 그늘이었고, 한쪽 길은 뙤약볕이었다. 처음에는 그늘로 가야겠다 싶어 방향을 틀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옆을 쳐다봤는데. 뙤약볕 사이로 능소화가 보였다. 능소화 좋아한다. 꽃이 예쁘다. 방향을 틀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능소화를 만났다. 안 그래도 능소화를 보러 한강공원에 갈 참이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신호를 서서 기다리지 말고, 능소화를 봐야겠다 싶어서. 양산을 꺼내들고 능소화 쪽으로 갔다. 그 길은 그늘이 없어 사람도 없었다. 반대편에는 그래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좀 있었는데. 핸드폰 꺼내들어서 사진 찍었다. 내 마지막 강의를 빛내줄 능소화니까. 기념으로. 그 앞에 횡단보도도 있어서 신호 맞춰 건넜다.

강의장에 40분 정도 먼저 도착했다. 내가 마지막 타임이다. 앞 강사가 수업을 하고 있어 들어갈 수는 없는 상황. 옆에 보니 빈 강의장이 있길래 들어가서 기다리며 강의 준비했다. 해야 할 말도 다시 정리해 보고. 준비하면서 적어뒀던 메모도 리뷰했다. 준비해 간 영양제도 먹고 마셨다. 강의 전 에너지가 높아야 한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은 두 시간 반 강의. 일어나서 스트레칭도 했다. 몸이 풀려야 입이 풀린다. 뇌도 풀리고. 얼굴 근육도 풀어주고. 아로마 오일도 한 방울 손바닥에 떨어뜨려 호흡했다. 앞 강의시간에 맞춰 준비가 끝났다. 화장실 다녀오니, 쉬는 시간이 되었길래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 담당자랑 인사를 나누고. 노트북 세팅했다. 세시 삼십분 강의가 시작됐다. 내 소개를 하면서 직업재활을 하면서 생긴 내 모토를 이야기했다. 내 모토는 '당신의 잠재력이 보입니다.'이다. 강의 마지막에 청강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여러 직업평가 도구들 중 가장 중요한 평가도구는 무엇인지. 저마다들 자기 생각 이야기했다. 내가 준비해 간 이야기를 꺼냈다. 내 모토가 정해지게 된 이유를 곁들여서. 강의가 끝났다.

강의 스텝들이 와서 인사를 했다. 처음 강의 교재를 연구할 때 만났던 팀장, 오 년 만에 봤다. 그간 어땠는지 이야기하며 몇 마디 나누고 있었다. 몇 명이 모여 인사하던 중 강의실 뒷문에서 누군가 들어왔다. 눈이 좋지 않아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루엣이 있었고,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A 인가 싶었는데 맞았다. 나랑 같이 일했었다. 전 전 직장 후배. 이년 만인가. 더 성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화장도 하고 머리도 길렀다. 살도 빠진 거 같아서 이야기했더니 요즘 살을 좀 뺐다고 했다. 자리를 옮겨서 근황을 이야기했다. 만날 거라는 생각 못 했는데, 뜻밖이라 더 반가워 나는 이얘기 저 얘기 했다.


자기 계발을 처음 시작하면서 라이프 플랜이란 것을 세웠다. 그때 40~50대의 내 모습은 직업평가연구소 소장이 되는 거였다. 퇴사하면서 집에 있을 때 플래너에 써진 계획을 보고 눈물이 흐른 적 있다. 생각한 것과 다르게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 날이었다. 삶은 흘러간다. 예측이 가능한 방향일 수도 있고, 아닌 때도 있다. 나는 지금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다 한들 내 삶이다. 다르게 가는 그곳에서도 뜻밖에 즐거움이 있고, 만남이 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또 한 번 알게 된 날이다. 그저 하루를, 나에게 보내진 시간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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