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가 이번에는 정말 퇴사하려나 봐. 회사에 이야기했다네"
"그래? 그럼 이번 토요일에 우리 집에 오라고 해. 술 한잔하자고. 저 양주 먹자."
내 친구인데, 자기 친구처럼 챙겨주는 남편.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급만남. 남편 이야기를 듣자마자, 영이에게 연락했다. 내일 저녁에 시간 되냐고. 흔쾌히 된다는 영이.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영이를 불렀으니 뭘 차려주면 좋을까 싶었다. 과일 좋아하는 영이. 오아시스 앱에 들어가서 수박이랑 파인애플을 주문했다. 배송시키면 다음날 아침에 받을 수 있다. 아침 일곱시. 현관 물 열어보니 오아시스 박스가 와있다. 남편이 오아시스 박스에서 수박이랑 파인애플을 꺼냈다. 수박을 씻었다. 그런 남편을 본 채니는 뭐 하는 거냐며 옆에 서서 쫑알거린다. 남편은 말했다. 채니가 좋아하는 수박 샀다며, 오늘 채니 이모도 오니까 잘라서 넣어뒀다가 이따가 먹자고. 남편은 수박을 반 갈라 잘라서 통에 담기 시작했다. 옆에 서있던 채니는 한 조각씩 수박을 받아먹으며 옆에 서있다.
나는 그 사이 쓰고 있던 일기를 마저 썼다. 쓰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언제 출발할 건지. 남편은 수박 다 잘라 놓고 씻고 출발하자고 했다. 기차, 버스, 경찰차, 소방구조대 등 탈것을 좋아하는 채니. 요즘 타요와 띠띠뽀띠띠뽀에 빠져있다. 매일 보여달라고 한다. 집에 티브이 없다. 가끔 아이패드로 한 번씩 보여준다. 인스타보다보니, 노원 기차마을이라는 곳이 있었다. 화랑대역이 없어지면서 그곳을 공원으로 꾸몄다. 스위스 기차마을이라고 전시도 하고 있다. 아이들이 좋아해서 갈만한 곳이라는 설명이 있어 예전에 저장해뒀던 곳. 얼마 전에 저장된 것들 쭉 훑어보면서 정리하다가 발견했다. 남편에게 보여줬다. 주말에 같이 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이동했다. 날씨가 덥다. 차 안에서 에어컨을 세게 틀면 얼굴이 시리고, 조금 낮추면 덥고. 창밖 내다보며 갔다. 하늘이 예쁘다. 구름도. 사진 몇 컷 찍었다. 채니는 뽀로로 노래를 틀어달라고 해서, 들으며 갔다. 가던 도중 채니가 자길래 노래를 끄자고 했다. 계속 노래를 들으니까 귀가 아파서.
노원 기차마을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주차했다. 인터넷 보니 주말에는 빨리 가야 주차 자리가 있다고 했다. 날이 더워서인지. 30~40%만 주차되어 있다. 입구랑 가까운 곳에 차를 댔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차가 보인다. 채니는 기차를 보더니 뛰어갔다. 아기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몇 팀 보였다. 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기차 두 개 구경하고, 실내로 들어갔다. 실내는 입장권을 구매해서 들어가야 한다. 열 번 방문하면 한 번은 무료로 구경할 수 있는 도장 쿠폰도 받았다. 실내는 스위스기차관이다. 스위스를 모티브로 해서 꾸며져있다. 15분 단위로 낮과 밤으로 조명이 바뀐다. 낮에는 하얀 조명이고 밤에는 분홍, 파랑, 노랑 등으로 바뀐다. 스위스 명소들이 있고, 산을 따라서 기차가 오가는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전시대 앞쪽으로 버튼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버튼을 누르면 특정 위치의 기차, 자전거, 혹은 사람 등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채니는 버튼을 연신 눌러대느라 바빴다. 기차가 움직일 때 움직이는 곳이 어디인지를 찾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한 쪽에는 기차를 직접 조정해 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어릴 때 레이싱카 레일 같은 것. 한 여덟 개의 레일이 유리 전시관 안에 들어있다. 전시관을 둘러 조종을 할 수 있는 버튼들이 설치되어 있다. 각 기차 번호가 쓰여있는 채로. 채니도 하나 맡아 앉아서 버튼 눌러보며 조종해 봤다. 사실 조종이라기보단, 버튼을 부수는 줄 알았다. 혹시나 해서 옆에 붙어서 채니를 보고 있었다. 실내 둘러보고 카페로 갔다.
카페는 주차장과 연결된 입구 쪽에 있다. 카페는 이층으로 되어 있다. 일층은 음료만 마실 수 있고, 한 시간 이용 가능하다. 이층은 브런치가 된다고 했다. 일층은 기차가 음료를 배달해 준다. 우리는 일층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한쪽으로 카페 공간을 둘러 테이블이 있다. 둘러진 곳을 따라 기찻길이 있다. 그곳으로 기차가 다니며 음료 배달을 하는 거였다. 음료를 주문했다. 몇 분 있으니 기차 출발 소리가 들렸다. 기차가 오더니 우리 우리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우리가 음료를 꺼내자 다시 기차는 돌아갔다. 채니는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서 섰다.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남편에게 안겨서 기차가 오는 곳을 가리키며 웃고 말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다면 진작 올걸 그랬다. 조금 컸다고, 이런 걸 좋아하고 이야기도 한다.
집으로 왔다. 씻고 영이를 맞을 준비를 했다. 여섯 시 좀 넘으면 도착한다는 영이. 시간에 맞춰 배달음식 주문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고기를 구워주겠다고 했다. 날도 더운데 불 앞에서 나랑 남편이 돌아가며 고기를 구울 생각을 하니 좀 어려울 것 같았다. 거기다 채니까지 같이 있으니. 요리하는 우리 옆에서 안아서 자기도 보여달라고 한다거나, 같이 요리를 하겠다고 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안되겠다고 그냥 시켜 먹자고 했다.
치킨, 깐쇼새우, 육회, 타코와사비 주문했다. 영이와 함께 먹을 술도 세팅했다. 밸런타인 17년산. 남편은 집 앞 마트에 가서 토닉워터랑 레몬도 사 왔다. 나랑 영이는 하이볼로 먹으려고.
사실 나는 술을 끊었다. 지난 이 월 아빠가 간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 뒤로 누군가가 술을 권해도 먹지 않았지만. 오늘은 영이를 위해 특별히 한잔하기로 했다.
영이가 왔다. 영이를 뒤이어 주문한 음식들도 도착했다. 같이 이야기하면서 먹었다. 주 이슈는 퇴사였다. 영이가 퇴사하겠다고 회사에 말한 것. 어떻게 되었는지. 계획한 날짜에 퇴사는 하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만류가 심해서. 회사에서는 개선 방안을 정해서 영이에게 말해줬다고 했다. 영이는 개선방향을 들어봤지만, 별달리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회사에서도 노력해 주겠다고 하니 잠시 퇴사 시기를 뒤로 미룬 것 같았다. 우선은 본인도, 회사도 같이 노력해 보는 것으로.
남편이 하이볼을 제조해 줬다. 레몬을 짜는 조리도구는 없다. 레몬을 반 갈라서 손으로 쥐어 즙을 내야 하나하고 내가 말했더니. 영이는 자기가 안다고 말했다. 인스타에서 봤다고. 어떤 연예인이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했나 보다. 자기도 보고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만 기억해뒀고, 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영이는 말로 설명하다가, 듣고 하는 내가 어정쩡하게 보였는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왔다. 설명도 해주면서 자기가 직접 했다. 하이볼 만들어둔 유리잔에 레몬을 가져다 대자 물처럼 레몬즙이 쭉 나왔다. 우리는 물개박수를 치며 신기하다고 말했고. 영이도 진짜 된다며 놀라 했다.
셋이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우리를 본 채니는 자기도 건배를 하고 싶다고 컵을 달라고 했다. 채니도 컵에 물을 채워줬다. 한 손으로 들고 위로 팔을 뻗으며, 짠이라고 말한다. 그러더니 혼자 웃는다. 한 번 더 하자고 해서 넷이 짠을 했다.
채니는 처음에 같이 음식을 좀 먹다가 배가 찼는지 식탁 의자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채니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이 채니를 내려줬다. 채니는 띠띠뽀가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이패드를 가져와서 채니를 식탁 근처에 있는 채니 책상에 두고 넷플릭스로 한 편을 틀어서 보여줬다.
우리는 이어서 음식들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영이와 나는 같이 해외여행 서너 번 갔다. 코로나 전에 매년 한 나라씩. 그때 남편은 서운해했다. 자기랑은 안 가면서 영이랑만 여행을 간다고. 2019년에 대만인가 어디를 가고 그 이후 코로나여서 못 갔다. 내가 결혼을 하기도 했고. 또 그 뒤로는 채니를 임신하고 출산하느라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다음에는 일본으로 여행 가보자고 했었는데. 다음은 없었다. 남편은 같이 여행한 번 가라고 말했다. 한나도 요즘 출산하고, 육아하고, 일도 하면서 많이 힘들어하는데 쉬는 시간이 없다며. 남편 친구가 일본에 산다. 그 덕에 남편은 일본에 몇 번 간 적 있는데, 그때 좋았던 곳도 이야기해줬다. 가보라며. 영이 퇴사하면 같이 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채니가 나를 불렀다. 같이 영상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채니 옆으로 갔다. 채니는 자기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내가 옆에 앉으니 와서 내 다리 위에 앉았다. 같이 영상 보면서 캐릭터 이야기했다. 남편과 영이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고, 나는 틈틈이 껴서 대화했다.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새로운 모습들이 보였다. 나랑 남편이 대화할 때는 알 수 없던 이야기. 나랑 영이가 대화할 때는 말하지 않던 이야기. 누구랑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대화 주제는 달라진다.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둘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덕분에 둘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재미있기도 했다. 둘 다 극 I 성향인데, 자기 이야기를 줄줄 풀어내며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 서로 노력하는 건가. 아무튼.
하루가 특별해지는 것, 채니와 같이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마을에서 기차를 발견하고 속도를 내서 뛰어갔다. 땡볕은 채니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채니는 단지 기차를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워했다. 나도 오늘 즐거웠다. 매일 다르게 성장하는 채니의 모습. 남편, 영이와 함께한 시간. 이십 년 넘게 안 그들의 미처 알지 못했던 모습을 봤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둘은 달랐다. 각자 삶에서 최선을 다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그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에 몰랐을 뿐이었다. 그냥 지나쳤다면 몰랐을 일이다. 우리가 모두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