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채로 두지 않을 용기

by 서한나

아침에 복숭아를 하나 꺼냈다. 상하려고 한다. 너무 실온에 오래 뒀나 보다. 월요일에 택배 받아서 후숙한다고 두고 매일 꺼내 먹었다. 수요일이나 목요일쯤에 냉장고에 넣어야 했다. 몇 개는 괜찮길래 놔뒀다. 상하려고 하는 것 네 개 들고 주방으로 왔다. 복숭아를 내려두고 왼손에 베이킹소다를 한 줌 쥐어서 복숭아 겉면을 문질렀다. 물기가 있으니 잘 흡착돼서 비벼진다. 그렇게 네 개의 복숭아를 모두 베이킹소다로 문질러서 헹궜다. 내가 복숭아를 씻고 있자 채니가 나에게 다가와 묻는다. 뭐 하냐고. 자기도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나는 채니에게 말했다. 껍질을 까서 잘라 복숭아 우유를 만들어 먹자고. 채니에게도 줄 테니 채니가 조금 잘라보라고. 채니는 그 말을 듣고 식탁에 자기 의자로 가서 앉았다.


나는 채니가 앉은 것을 보고 복숭아 한 개에서 반을 갈라 껍질을 벗겼다. 껍질째 먹는 게 좋아서 열심히 닦아내긴 했지만. 채니는 껍질이 있으면 먹지 않는다. 다 뱉어내기도 하고. 채니 것 얼른 껍질 벗긴 뒤, 채니 앞에 접시랑 플라스틱 칼이랑 복숭아 반개를 줬다. 채니는 양손을 들고 하늘로 뻗으며 와아라고 소리를 지르며 채니가 잘라야지라고 말했다. 채니가 자르는 것을 보고 나도 이어서 복숭아 조각을 냈다. 우유랑 꿀 좀 섞어서 복숭아와 함께 닌자에 갈았다. 가는 버튼 채니 보고 누르라고 했더니 좋아한다. 한번 눌러보더니 소리에 커서인지, 손에 진동 때문인지. 눈이 휘둥그레지며 이게 뭐야라고 말했다. 나는 갈아서 음료를 만드는 거라고 말해줬다. 채니가 버튼을 꾹 누르고 십초 정도 있었더니, 얼추 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채니에게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다고 말하면서 코드 먼저 뽑았다. 헤드를 분리해서 주방 조리대에 올려뒀다. 컵을 가져와서 통에 대고 따랐다. 채니는 복숭아 우유를 받아들고 채니가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며 홀짝홀짝 마셨다. 나도 이어서 컵에 따라 마셨다. 남편은 우유를 먹지 못한다. 남편 거는 그래서 뺐다. 대신 한 개를 잘라서 봉투에 담아뒀다. 출근할 때 가져갈 수 있게.


남은 복숭아는 깍둑썰기했다. 잼병을 꺼냈다. 소독을 해서 설탕과 함께 켜켜이 쌓았다. 그걸 보던 채니는 뭘 하는 거냐고 물었고, 나는 청을 만들어서 먹으려고 한다고 말해줬다. 날이 더워서 실온에 둬도 금방 녹을 거 같았다. 뚜껑을 닫아 주방 한편에 놓아두었다. 사용한 칼이랑 수저 등을 정리하고 설거지했다.




어제저녁 일곱시가 다 되어갈 즘 강의 의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전화가 온 사람은 누군지 모르지만, 자기소개를 했고 실장에게 소개받았다 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하다면서 강의를 해줄 수 있냐고 했다. 그는 내가 몇 년 전에 그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한 적 있다 말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그 협회에서 여러 번 강의하긴 했다. 어떤 프로그램인지까지는 알지 못하니까. 상대방은 날짜와 시간을 말했다. 세 시간을 해달라고. 나는 주제가 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담당자 목소리가 떨렸다. 당황한듯했다. 시간과 날짜만 맞으면 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주제를 얼버무렸다. 주제가 정해지지 않은 거냐고 물었더니 맞단다. 우선 시간과 날짜를 확인하고 기획하려고 했다고. 아직 거기까지 기획하지 못했다고 했다. 처음에 자기소개를 할 때 크고 자신감 있던 담당자 목소리는 통화를 할수록 작아졌다. 그러더니 결국 말끝을 흐리기까지 했다. 상대가 말한 날짜에는 아침 일정을 조율해야 할 게 있었다. 나는 일정 확인이 필요한 게 있어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언제까지 줄 수 있냐고 나에게 물었다. 내일 아침 아홉시에 연락드리겠다고 하며 통화를 마쳤다.


아침 아홉시, 전화 걸었다.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남겨뒀다. 조금 있으니 전화가 왔다. 그녀는 그럼 가능하신 거죠라고 말하며, 주제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을 이야기했다. 여전히 당황한 것 같다. 화기 너머 그 사람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날도 더운데, 내가 더 땀을 흘리게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전에 강의 한 적 있다는 말만 되풀이. 나는 사실 강의를 여러 차례 하니까 어떤 프로그램에 속해서 강의를 한 건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럼 전체 세미나에서 어떤 주제들을 다루냐고 물었다. 프로그램 소개, 기조 강연 정도였다. 별달리 내가 할만한 것에 대한 힌트를 얻지 못했다. 상대방은 내가 했던 것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라고 했다. 나도 어떤 주제가 적절할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강의 의뢰가 올 때 대체로는 가안이 확정되어 연락 오는 경우가 많다. 주제가 정해져 오기도 하고. 바꿀 수 없는 대주제가 있다면 그대로 한다. 강사가 역량에 따라 조금씩 바꿀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실제 필요한 것들을 상대방이 요청하기도 하고. 그럼 담당자랑 그 주제로 이야기하면서 이걸 이렇게 구체화하면 더 도움 된다거나, 이 부분은 줄이자거나 대화가 오간다. 주제가 정해지지 않았거나 아이디어가 필요한 경우에도 전화를 걸어오는 경우 많다. 그럼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제안해 주기도 한다. 같이 고민하고. 강의 제목도 변경해 주기도 하고. 어떤 식의 흐름을 가져갈지도 말해준다. 아이디어만 제시하고, 내가 강의를 하지 않은 때도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나도 나보다 더 적절한 강사가 있으면 추천하기도 하니까.


그녀와 첫 통화에 나도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날것의 통화를 들은 지 오래됐다. 직장에서 일할 때야 신규직원들 오면 가끔 겪을법한 일이다. 혼자 일한지가 사 년 정도 되면서, 정제된 대화만 했다. 한번 겪었기에 오늘은 좀 예상했던 바. 어제보단 덜 당황스러웠다.


처음 일할 때가 생각났다. 결재서류를 올려야 하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서류를 모니터로 보고, 출력해서도 보고, 선배한테도 물어보고. 결재 가기 전 팀장 분위기도 살폈다. 기분 좋을 때 가려고. 질문에 대답을 못할까 걱정됐다. 선배들이 말해주는 것이나 내가 생각해 본 예상 질문 만들어서 답도 써보고 말도 해보고. 속으로 되뇌길 수차례. 머뭇거리거나 자기 생각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팀장은 싫어한다고 선배들은 말했다. 찍히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어쩌면 내가 떠올라서 어제보단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친구를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동생과 같이 점심 먹었다. 동생이 일을 그만뒀다. 낮에 시간이 된다. 어제 통화로 같이 점심 먹기로 약속했다. 시간 맞춰 엄마와 동생이 데리러 왔다. 나는 차가 없다. 기동성 좋은 엄마가 데리러 와준다. 엄마는 시원한 냉면을 먹을까라고 해서 집 근처 냉면집 검색해 봤다. 마땅치 않았다. 차 탔더니 동생이 샤부샤부 같은 게먹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집 근처에 샤부샤부 집 체인이 생겼다. 집에서 가깝고, 주차장도 넓었던 거 같아(지나가는 길에 볼 때) 가자고 했다. 내비게이션에 찍어보니 집에서 일 킬로미터. 경로 안내를 눌렀다.


매장에 도착했더니, 주차장은 뒤편이었다. 주차요원이 자리를 안내했다. 엄마는 차를 댔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나와 매장 입구에 갔다. 자동문이라 버튼을 눌렀다. 이중문이었는데, 둘 다 한 번에 열렸다. 직원이 자리를 안내했다. 들어간 입구에서 왼쪽에 샐러드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왼편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른편으로 갔다. 직원은 이쪽은 더운 자리라고 했다. 나와 엄마가 추위를 잘 타니까 동생은 직원에게 괜찮다고 앉겠다고 했다. 우리가 앉은 쪽은 아이와 온 가족들이 있었다. 메뉴를 주문했다. 직원은 처음 왔다고 하니 이용방법을 설명해 줬다. 복날 이벤트도 있다고 했다. 닭 다리를 추가로 준다고 했다. 육수에 넣어서 십오분 정도 끓여서 먹으면 된다고 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한 바퀴 둘러봤다. 피자, 치킨, 샐러드 등 음식 다양하게 있었다. 과일도 네댓 종류는 됐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빙수, 커피 등 디저트도 다양했다. 제일 좋았던 디저트는 초코 분수다. 마시멜로 꼬치를 초코 분수에 담가서 잔뜩 초코를 묻혀 먹는 것을 좋아한다. 뷔페에 가면 초코 분수가 있는 집인지 꼭 확인한다. 여기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쪽이 디저트여서 초코 분수부터 보였다. 들어가면서부터 내가 어깨춤을 췄더니 동생이 웃었다. 나는 음식들 둘러보고 제일 먼저 초코 분수 앞으로 갔다. 마시멜로 코치 세 개 만들어서 분수에 가져다 댔다. 꼬치를 돌려가면서 초코를 묻혀 접시에 담았다. 자리로 갔다. 먹고 시작했다. 중간중간에도 가져다 먹었다. 나는 먹다가 동생에게 말했다. 숀이 점심 먹자고 해서 같이 먹으니까 좋다고 안 그러면 점심은 혼자 먹어야 했다고. 내 말을 들은 동생은 말했다. 혼자 먹을 누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안쓰럽다고. 나는 말했다. 엄마도 맨날 혼자 먹는다고. 안쓰러운 게 아니라 누구나 그러하다는 것을. 같이 맛있게 먹다가 동생이 음식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엄마는 그 틈을 타서 내게 말했다. 며칠 전 미꼬담에서 식사했던 얘기를. 남편이 어떻게 하든 놔두라는 것이었다. 자식 그렇게 생각하고 애지중지하는데, 내가 너무 뭐라고 한다는 것이다. 엄마가 더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속이 상했다는 것. '거참 드럽게 뭐라고 하네'라고 했던 남편의 말이. 그 소리 듣자마자부터 밥이 먹히지 않았다며. 집에 가는 길에도 속이 상해서 아빠에게 이야기했다는 것.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엄마는 내가 남편에게 뭐라고 한 것도 한 거지만. 남편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싫었나 보다. 엄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엄마는 말을 덧붙였다. 아이가 생기고 나면 안 싸우다가도 그렇게 싸울 일이 생긴다면서. 서로 생각이 다르다 보니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집에 와서는 생각했다. 그날 집에 오면서 남편이 부모님께도 죄송했다고 말했던 것을 말했어야 했나. 내가 염려했던 대로 엄마가 걱정하고 있었던 것도 미안했다. 며칠 속앓이 했을 터다.




관계에는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성숙해지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복숭아는 과후숙을 하는 바람에 썩어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 덕에 복숭아 우유도 되고, 복숭아 청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터다. 성장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썩어문드러지기도 한다. 그걸 도려냈을 때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갈 수 있다. 지금 내가 직장 일로 노련함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신입시절 성장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아무 말 못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어른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남편에게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썩은 채로 놓아두지 않아야겠다. 도려내고 바뀌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 그 과정을 통해 달달한 복숭아 우유도, 복숭아 청이 되기도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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