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빙하 앞 위스키
술 자체보다, 그와 곁들이는 '조연'들이 씬 스틸러가 될 때가 있다. 술을 마시는 순간의 분위기는 당연한 것이니, '지금 이 조명... 온도... 습도...'는 일단 논외로 한다. 술이 빛나는 순간에는 여러 요소가 일조한다. 각자 생각하는 이상적인 음주의 순간이 있을 텐데, (없다고? 이런...) 남미 여행을 나서는 내게 그 버킷리스트는 '빙하 위에서 마시는 빙하 위스키 온더락 한 잔이었다.'
파타고니아의 드넓게 펼쳐진 빙하 위를 걷는 트래킹을 마치고 마지막에 가이드가 호쾌하게 부순 만년설을 글라스에 담고 위스키를 콸콸 부어주는 그 맛은 어떨까. 부어주는 위스키 래야 기껏해야 몇 년 묵었는지 모를 듀어스, 커티샥 정도 저렴한 녀석으로 보였으나, 기대감을 가지는 데는 충분했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가 가는 동계 기간(6월) 에는 투어가 없다. 마치 약 올리듯이 불과 방문 일정 1주 전까지는 -기대하고 기대하던 만년설 온더락 위스키가 포함된- 빙하 트래킹 투어가 있었다. 아... 약 오른다!
그래도 파타고니아에 와서 빙하는 봐야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파타고니아의 엘 칼라파테로 향했다. 혹시 어디 유빙이라도 건져서 위스키 한 잔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서.
위스키의 유무와 관계없이 (안개 때문에 더)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빙하 계곡은 방문자를 들뜨게 만들었다. 자, 이제 빙하를 건지러 가볼까?
하지만 꼼꼼한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국립공원 당국은 관강객들이 물가까지 내려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데크로 산책로를 만들어두고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비수기라 사람도 적고 따로 적극적인 감시인이 붙어있지는 않았지만, 어글리 코리안이 될 수는 없었다. 나무가 워낙 빽빽하게 둘러있기도 하고, 계속 빙하 조각이 "쩡-" 소리를 내며 떨어지니 접근을 막는 게 당연해 보였다. (물가까지 간 사람이 빙하까지 가지 말란 법이 없으니)
빙하 온더락은 건지지 못했으나 그래도 한 잔 해야지.
위스키를 힙 플라스크(Hip Flask, 휴대용 술병)에 담아왔다. 같은 아메리카의 기상이 담긴 미국 위스키로.
생각해보니 얼음이 있어도, 담을 잔이 없었다.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해 본다. 청량한 얼음 바람을 맞으며 들이키는 독한 미제 버번위스키. 좋았다. 아니 그런데... 더 좋은 게 있다는 것을 안다. SNS를 접하고 상대적 행복을 잃어버린 부탄 사람처럼, 더 좋은 것을 알아버렸으니... 조금 눈물이 난다.
뭐 어쩌랴, 억울하면 다시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