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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가의 꽃 Feb 09. 2023

나의 불안에게 바치는 꽃

히아신스

또다시 몇 주째 불안이 지속되고 있다.  

이유가 명확한 불안과 어디서부터 오는지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불안 그리고 미리 내일을 빌려와 사서 하는 불안들이 한데 섞여서 나를 이리저리 휘젓고 있다.

이 불안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과연 종착지가 있을지 끝이 보이지 않아 아득하기만 한 이 와중에도 해야만 하는 일들을 처리하고 꽃시장을 가고 강아지 산책을 하고 청소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불안에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이렇게나 발버둥 치지만 어느 날은 저 중의 하나도 해내기가 힘들다. 그런 날은 집의 블라인드를 다 내린 후 어둠 속에서 구겨져 자기혐오와 마주하고는 한다.


며칠 전은 굳이 새벽 시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지만 굳이 다녀왔었다.

생각보다 일찍 떠진 눈과 동시에 쿵쾅거리는 심장과  한없이 내려앉는 기분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모자만 눌러쓰고 시장으로 향했다. 동트기 전의 불그스름한 도로 위를 막힘없이 썡쌩달리니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도착한 나의 유일한 불안 도피처, 새벽꽃시장의 문을 연다.


아직 사림들이 붐비기 전의 시간이라 시장은 고요하다. 이 일을 하고 나서 생긴 꽃가루 알레르기로 인해 코는 점점 막혀오고 눈은 빨개져왔다.  조용한 시장 속, 꽉 막힌 코를 킁킁 거리는 내 콧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이날의 꽃시장은 내 불안에 응급처치가 되지 않는 듯했다.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아도 선뜻 손에 가는 꽃이 없었다.


불안을 양쪽팔에 끼운 채 하염없이 거닐다 꽉 막힌 콧속을 무심하게 스치는 향기에 고개를 돌렸다.

히아신스였다.

히아신스의 특유의 진한 향기가 마스크 안 킁킁거리는 내 콧속까지 도달하자 1년 전 이맘때 맡았던 히아신스 향기가 기억이 났다. 마치 1년에 한 번 정도 어쩔 때는 한 번도 못 볼 때도 있지만, 그렇게 만나게 되는 친구를 우연히 만난 기분이었다.

향기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잠깐 스치는 향으로도 나를 1년 전의 나로, 아니 훨씬 더 예전의 나로 데려가주었다.


10여 년 전 꽃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  수업 첫 시간 소재로 하얀색 히아신스가 주어졌었다.

30살이 되던 해 제2의 직업으로 꽃을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용기 내 두드렸던 강남역의 어느 학원에서 꽃이름도 하나 모르던 내손에 처음 쥐어졌던 꽃이 히아신스였었다.

남들에 비해 훨씬 느린 속도와 어설픈 손놀림에 히아신스 특유의 약한 줄기는 찢어지고 부러지는 등 애타는 마음으로 겨우겨우 완성했었던 그날의  흰색 히아신스 부케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 안  창문에 비친 내 손에 들려있던  상처투성이의 히아신스 부케가 나를 지금 여기까지 데리고 오지 않았나 싶다. 꽃송이는 떨어져 나가고 줄기는 너덜너덜해져 간신히 리본으로 봉합되어 있던 히아신스 한 다발이 짠하도록 아름다웠고 뒤늦게서야 코끝을 찌르던 그 향기가 나를 벅차게 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불안하지만 설레었었고 두려웠지만 의욕적이었다.

시장에서 만난 히아신스는 내 양팔 한가득 매달려있던 불안을 잠시 내려놓아주었다.

꽉 막힌 콧속 사이로 스며드는 히아신스의 향기가 추락하던 내 마음을 마비시키듯 더 낙하하지 않도록 꽉 잡아주었다.  


10년 전의 히아신스가

10년 후의 내 불안을 안아주었다.


내 불안에게 히아신스를 선물한다.

10년 후 이맘때쯤 또다시 불안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때도 나는 히아신스를 나의 불안에게 바치고 싶다.

히아신스 짙은 향기가 내 불안을 집어삼킬 수 있도록  여리디 여린 줄기를 꽉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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