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거품처럼

첫 만남이 씁쓸했던 막걸리와 소주, 그리고 맥주 이야기

by 보라
대학 시절 술잔 속에서 부딪히던 웃음과 서툰 젊음.
사라지면서도 오래 남는 기억의 거품들.


대학에 들어가니 3월에 ‘신고식’이란 걸 하더군요.
누구에게 무엇을 신고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A4 한 장 가득 이상한 신고문을 외워야 했습니다.
틀릴 때마다 벌주로 막걸리를 마셔야 했죠.

선배가 내미는 잔을 한 모금씩만 홀짝이다가
“왜 쭉 안 마시냐”며 혼이 났습니다.
잘 외워도 트집을 잡아 불합격시키니 기가 막혔죠.

어제까지만 해도 다정하던 선배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했습니다.
겁이 나서 막걸리를 연거푸 들이켰지요.
혀가 꼬이고, 다리는 힘을 잃어 갔습니다.


그러다 죽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지금도 막걸리만 보면

몸이 절로 떨립니다.







그게 막걸리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소주 이야기입니다.

같은 해 봄 축제 때였습니다.
과 주점을 운영했는데,

마지막 날 남은 술과 안주를 털어
뒤풀이를 한다더군요.
선배, 동기 할 것 없이 모두가 들떠 있었습니다.

그날 처음 만난 술이 레몬소주였습니다.

캬~! 원래 이렇게 맛있나요?
연한 노란빛, 달콤하고 상큼하고 톡톡 터지는 맛.
이게 정말 소주가 맞나요?

“레몬소주야, 너는 내 운명!”을 외치며
병을 끼고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볼은 발갛게 달아오르고,
정체 모를 행복이 온몸을 감쌌습니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니,
행복은 두통과 복통으로 변했고
그 후로 소주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입니다.

첫 만남이 왜곡되었기에
'술' 하면 ‘고통’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일까요?
맥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건.


첫 만남을 망치지 않은 인연이기에
오래 이어가고 싶은 건.

시원하고 부드럽고, 편안하게 톡 쏘는 맥주.
액체 위에 얌전히 앉은 생크림 같은 거품은
참 사랑스럽습니다.

친구와 새벽 네 시까지
맥주를 사이에 두고 나누던 이야기,
세계맥주병 스무 개를 늘어놓고 깔깔거리던 웃음.

그 시절 제 꿈은
'마흔 중반에 퇴직하고 재즈 바 차리기'였습니다.
매일 재즈 들으며 맥주 마시는 삶이 멋져 보였거든요.

시간은 놀랄 만큼 빨리 흘러
마흔 지난 지는 이미 까마득하고,
그동안 마신 술이라곤 맥주 몇 모금뿐입니다.

다시 맥주가 고팠습니다.

이십 대처럼 밤을 새워 술잔을 기울일 수 있을까.
그때처럼 음악을 곁들여 가슴 설레며 마실 수 있을까.

유난히 맥주 거품이 그리운 날,
그때의 친구들이 보고 싶은 날,
시원한 잔을 부딪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오늘 같은 날은
막걸리 잔을 내밀던 선배 얼굴마저
어쩐지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추억은 다 아름답습니다.
거품 위에 앉은 햇살처럼,
서로에게 부드럽게 스며드는 시간처럼,
특히 맥주와 함께 음미한다면요.

(그날 레몬소주와 함께 흐르던 노래,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
싱그러운 5월의 공기처럼,

마음 한 켠에 지금도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