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길 위로 - 구두와 인생

뚜벅뚜벅, 삶을 고치는 손길

by 보라

신발장 한켠,

겨울 부츠, 봄·가을 구두, 여름 샌들, 슬리퍼들이

뒷굽이 닳고 끈이 헐거워진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한때는 애정 어린 패션의 일부였는데,

새로운 유행과 계절에 가려

그 존재를 잊고 살았던 거지요.


"어머, 이게 여기 있었네!"

반가움이 먼저 찾아왔습니다.


큰 봉투를 가져와

수선이 필요한 신발들을 하나하나 꺼내 담습니다.


딱 한 번 신었는데 긁힌 샌들,

닳고 닳은 슬리퍼,

가을빛을 닮은 부츠,

앞코가 닳도록 편했던 구두들..

봉투는 금세 불룩해졌습니다.


이 봉투를 들고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어릴 적 살던 집 근처의 구두 수선방으로 향합니다.

엄마가 자주 가시던 곳이지요.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아저씨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실까..

괜히 긴장이 되고, 또 뵙고 싶었습니다.


큰 사거리를 지나자

작은 상자 같은 가게가 보입니다.

창문 틈으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아저씨가 계신 게 분명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 평 남짓한 공간의 바닥엔

신문지가 아무렇게나 깔려 있고,


신문지 위엔

오래된 본드 통, 구두약, 재봉틀, 낡은 연장들..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따라오던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이 되었고,

척척박사라 불리던 아저씨는

어느덧 구부정한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몇십 년을 같은 자리에 앉아

한 땀 한 땀 신발을 고치는 삶.

성실함과 책임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저씨는 오늘도 구두를 꿰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습니다.


옻닭과 한약재,

사약의 독성,

고령화 사회와 사람됨에 대한 철학까지.

바늘 끝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가 함께 엮여 나옵니다.


신문지를 깔고 앉아 기다린 한 시간 반.

수선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마치 인생 한 편의 강의를 듣는 듯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이어오신 아저씨의 모습.

그 옆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 손을 거쳐 새 생명을 얻은 신발들은

이제 다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당당히 걸어갈 수 있겠지요.


나 역시 이 신발을 신고

일터로,

여행지로,

전국 방방곡곡,

세계 구석구석을 누빌 것입니다.


뚜벅뚜벅 걸어가

사람들 속에 섞이고,

그 곁에 닿아 사는 일.


그건 어쩌면 아저씨가 보여주신

삶의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다시 나의 발자국을 새겨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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