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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보다 Nov 10. 2023

내 이름은

나는 이효리와 동갑이다. 1년 차이로 MZ세대에 끼지 못한 79년생. 그 시절, 나의 할아버지는 국어선생님답게 내 이름을 순우리말로 지어주셨다. 예로부터 보라색은 고귀한 색으로 불려 왔기 때문에 귀한 사람 되라는 의미로 '보라'라고 지으셨다고 한다. 시커먼 아들들이 가득했던 집안에서 첫 손녀를 보시고 할아버지는 너무나 기쁘셨다고 한다. 그래서 작명소에서 얼마의 돈을 주고 지은 이름이 아닌 직접 지으신 이름을 첫 손녀에게 선물해 주신 것이다. 이는 집안에서 유일한 일이었다. 내 뒤로 사촌여동생이 2명이나 더 태어났지만 그들은 받아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선물. 극내향형인 나에게 감당키 힘든 매우 특별한 선물이었다.


나의 출생신고를 하러 갔던 엄마는 이름의 한자칸을 비워두기가 섭섭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 순간 떠오른 한자로 칸을 채워 넣었다고 했다. 寶(보배 보)羅(펼칠 라), 이것이 또 다른 나의 이름이다. 나는 한자칸을 채워주신 엄마에게 무척 고마웠다. 다른 사람 이름에는 다 있는 한자가 내게도 있어서 안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획이 많아서 쓰기 어려운 한자였지만 쓰고 또 썼다. 한글로는 받침도 없고 허전한 내 이름, 한자로는 가득가득 차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이름 예쁘다고 이쁨 많이 받던 유년시절이 지나고,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내 이름은 나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전교에 나와 같은 이름은 한 명도 없었다. 새 학년이 되면 출석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이어서 선생님들에게 항상 1순위로 호명되었다. "네가 보라면, 네 동생은 파랑이냐?" 라며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가뜩이나 여자애들 이름을 정상적으로 부르지 않는 남자애들에게 나의 이름은 푸짐한 잔칫상이었다. 여기 보라, 저기 보라, 만나보라, 바보라... 여기에 텔레토비의 등장은 치명적이었다. 가장 크고 못생긴 텔레토비가 보라돌이라니.


'할머니가 되기 전에 개명해야겠어. 손자한테까지 놀림당할 수 없잖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은 인생드라마가 되었다. 일이 안 풀리면 왠지 이름의 저주 때문인 것 같은 느낌, 희진이라는 평범하고 예쁜 이름을 갖고 싶은 마음. 그런 삼순에게 자신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는 남자가 나타나 사랑을 이뤄가는 스토리에 한참 빠져있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보랏빛 향기>를 불러제꼈다. "그댄 나에게 사랑을 건네준 보라~" 마지막을 이렇게 개사하는 것까지 똑같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으리라. 너무 뻔했고, 고백을 빙자한 놀림받는 느낌까지도 들었다. 나에게 예의 그 노래를 한 번도 불러주지 않은 남자가 있었으니, 지금의 내 남편이다. 삼순이의 삼식이처럼 내 이름을 그냥 받아주는 사람을 만났다.





세월이 흘러 40대가 되었다. 요즘 아이들에게 나의 이름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선생님 이름 특이하지?"

"뭐가요, 아닌대요, 우리 반에도 보라 있어요."

이제야 내 이름이 어디에나 하나 정도는 있을법한 이름이 된 것이다. 비로소 제 시대를 만난 내 이름. (할아버지, 시대를 너무 앞서가셨어요.)


제일 싫어하는 색깔은 보라색이었고, 이름이 콤플렉스였으며, 자신의 이름이 낯설어서 고민했던 아이는 이제 보라색의 우아함을 느낄 줄 알고, 필명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 이름을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중년의 여성이 되었다. 간혹 누군가 딸애한테 "보라야"라고 불러도 '아, 내 이름이 우리 딸애 이름이라고 착각하셨구나.'라며 당황하지 않고 바로 잡아줄 여유도 생겼다.


내 이름을 받아들이고 좋아하게 되기까지 무려 40년이 걸렸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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