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페르소나
뭐든 색이 강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존경할 만하다. 그게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 그 어떤 색이든. 그 색을 짙게 하기 위해,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찾고 공부했을까. 색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상당한 용기를 요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색을 찾지 못했고, 섣불리 그 색을 짙게 만들어 나를 정의하고 싶지도 않다는 걸 우선 말해두고 싶다.
최근 들어 젠더이슈가 눈에 많이 밟힌다. 2019년에 방영한 고간지(고등학생 간지 대회)라는 프로그램에서 젠더리스 룩을 볼 때만 하더라도 희한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남자가 치마를 입으면 젠더리스 룩인가 하며 넘겼다.
그런데 이젠 그 단어, 젠더에 조금씩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양한 방향의 시각을 알고 싶어 졌고, 밀리의 서재를 이용해서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그러나 맹목적인 비난만 가득한 책들은 오히려 내 관심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그중 추천하고픈 책은 없었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무섭다.
함부로 꺼내기도 어려운 이 단어에 더 이상 무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u.will.be.a.feminist라는 인스타를 팔로우하게 됐다. 내게로 향하지 않음을 알지만 매일같이 그들이 표출하는 분노는 처음에 감당하기 힘들었다. 정신을 차리게 된 건 하루에 성 비위 관련 뉴스들이 10개 남짓씩 된다는 걸 알게 된 후였다. 아무 생각 없이 슬라이드를 넘기다 모두 동일한 날짜에 발행된 성 비위 뉴스임을 알게 됐다.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면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고 핸드폰을 꽉 쥐던 나, 자취방에 남자 신발과 옷을 갖다 두고 택배를 받던 친구, 학교에서 성추문에 휩싸여 쫓기듯 휴학한 남자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온갖 뉴스가 남일이 아님을, 24년 동안 나 역시 그 위험에 노출돼왔음을 느꼈다. 둔감해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가해자들이 너무나도 태연한 페르소나로 추악한 면을 가리고 있기에, 겪기 전까지 그 존재를 모른다는 거다.
구스타프 융은 인간이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간다고 말했다. 타인의 페르소나를 보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는 사람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라거나, 학창 시절에 칫솔을 입에 문 학생을 혼내는 선생이라거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수 개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상황에 따라 선택해서 쓴다는 건 놀랍지 않다. 하지만, 그중 하나의 페르소나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혐오를 표현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는 20대 여대생을 페르소나로 개발했다. 레즈비언, 흑인, 페미니즘, 장애인에 대한 혐오 발언을 하면서 사용이 중단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누군가들은 이루다와 섹드립을 주고받는 루트를 찾아 공유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여고생이 이루다 역할을 해준다는 오픈 채팅방 수십여 개가 개설되어 성 상품화의 온상이 되었다. 이건 특정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의 페르소나 문제다.
사회는 개인에게 특정 페르소나를 기대해왔다.
젠더리스 룩이라는 게 잘 와 닿지 않는 이유는 기존의 쇼핑몰만 봐도 알 수 있다. 쇼핑몰들은 대개 male, female, kids로 대분류를 한다. female에겐 주어진 옷 선택의 폭이 넓다. 다양한 색과 원단, 소위 말하는 매니쉬 한 디자인의 옷까지도. 얼마든 구하기 쉽고, 입고 다니더라도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는다. 여자들은 멋진 여성 내지는 옷 잘 입는 여성이라는 페르소나를 장착하게 된 거다. male의 경우는 다르다. 3단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다니고,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를 입고, 치마를 입고도 혐오의 눈길을 피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실에서 젠더리스 룩은 여성보다는 남성의 자유를 위함이다. 성별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젠더리스 룩의 취지인데, 여성이라는 성별에게는 큰 영향이 없으니. 남성도, 그 외의 성별을 가진 사람들도 혐오 없이 개성을 표할 수 있고, 그들이 강요당하던 페르소나를 갈아치우게 되길 바란다.
이 글을 준비하기 위해 책과 영화를 보며 걱정이 됐다. 사회적 페르소나를 벗으라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강요하는 시대가 온 건가? 편한 대로 사는 것을 보고 남들이 멋대로 나를 정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대표적으로 내가 자주 고민하게 되는 숏컷, 노메이크업, 노브라는 급진 페미니스트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오해를 사기 싫어 오히려 더 코르셋을 조인다는 생각이 들면 답답해진다. 기존에 요구되던 페르소나를 벗자는 강박으로 선택의 폭을 줄여선 안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