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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ccoli pen Oct 22. 2021

잣 열매 (여섯 살, 11월)

여섯 살의 스케치북


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딸아이는 발도르프 교육을 지향하고 있는 어린이집을 다녔다. 사실 특별한 계기는 없었고 인연은 우연히 시작되었다. 집 근처 어린이집에 가벼운 마음으로 등록했다가 등원을 격렬하게 거부하는 아이와 씨름을 하며 속앓이를 하던 어느 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새롭게 오픈한 어린이집 플래카드를 보고 이끌리듯 들어가서 원서를 쓰고 아이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보내면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점은 선생님이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의 입장을 우선하시는 것이었다. 어려서 배워야 하는 존재로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를 어른처럼 충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서 대해야 하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한다는 점이 좋았다. 사실 부모 입장으로는 양보하고 기다려야 할 일이 많아서 힘들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그곳에서는 무엇인가를 배우고 습득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대신 느리고 심심하지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소소한 일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산책은 가장 중요하고 긴 시간이 소요되는 일과였다. 손에 손을 잡고 줄을 서서 걷는 산책이 아니고, 마치 산과 공원의 문을 아이들에게 열어준 것처럼 정해진 주제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뛰어노는 자유로운 산책이었다. 덕분에 아이는 자연스럽게 자연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딸아이와 길을 나서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가는 길 걸음걸음이 즐거웠다. 바닥에서 발견한 예쁜 돌들을 주워 모으고, 민들레 씨앗이 보이면 입에 바람을 가득 모아서 날려주어야 한다. 비가 그치면 길에 나온 지렁이를 풀숲에 옮겨주는 일도 중요하다. 들풀이나 열매 이름에도 꽤 해박해서 익숙한 풀들을 보면 길을 가다가도 멈추고 그 자리에 앉아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반가워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으나, 마음을 비우고 함께 즐기면 행복해졌다. 

내가 모르는 식물 이름도 제법 많이 알고 있어서 아이에게 배워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산에서 본 잣 열매에 대해 신나게 설명하다가 잣 열매를 본 적이 없다는 엄마를 위해 직접 그림을 그려서 가르쳐 주었다. 역시 설명은 글보다는 그림이지. 이제 산에서 잣 열매를 보면 나도 반가워할 수 있다.

그때도 지금도 나무 많고 공원 많은 우리 동네는 최고로 고마운 육아 파트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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