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의 스케치북
딸아이는 글을 배우기 전, 글씨를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이집에서는 물론이고 나 역시 글자 교육은 조금 느긋하게 시작해도 된다는 입장이어서 주변의 누구도 본격적으로 글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어른들이 사용하는 재미있는 모양의 기호들은 이미 아이의 호기심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어른들이 가르쳐 줄 생각이 없다 보니 다섯 명 남짓의 동갑내기 아이들은 서로의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그들이 제일 처음 그리게 된 글자는 서로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싶을 때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마련되어 있는 각자의 종합장에는 서로의 이름이 마치 패턴이나 기호처럼 그림과 섞여 있었다. 그렇게 어른들의 의도적 무관심 속에 친구들끼리 글자를 배우던 아이들은 여섯 살에서 일곱 살 정도의 나이가 되자 받침이 단순한 글자는 어렵지 않게 읽거나 그리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아이들의 능력이 신기하고 사랑스럽다.
엄마가 쓰고 있는 것과 같은 달력이 갖고 싶었던 딸아이는 자신만의 달력을 만들었다. 그림과 알고 있는 글자를 마음 가는 대로 신나게 섞은 뒤 여러 장을 묶어서 자랑스럽게 벽에 붙여 놓았다. 이것이 달력이라는 것은 물어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아이는 어쨌든 이것을 달력이라고 불렀다.
5년이 지나 열한 살이 된 딸아이는 이제 글자도 배우고 숫자도 배워서 공부라는 것을 한다. 학원을 많이 다니지 않아도 구색을 갖춰서 몇 군데 보내다 보니 숙제도 제법 있다. 그래서 아이는 너무 바빠졌다. 놀고 싶지만,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으니 둘 다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친구들과 신나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밀린 숙제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내게 된다.
‘공부하는 중’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중’이라고 쓰인 그 시절 아이의 작품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저릿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