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간판 없는 거리>
<간판 없는 거리>
정거장(停車場) 플랫폼에
내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文字)도 없어
모퉁이마다
자애(慈愛)로운 헌 와사등(瓦斯燈)에
불을 켜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윤동주, <간판 없는 거리> (1941) 전문
내가 처음 윤동주를 읽은 건 중학교 1,2학년 무렵이었다. 그 당시 교과서에 윤동주가 실렸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 시절 난 윤동주의 시집을 샀고 40년 동안 간직해 왔다. 책날개에는 아직도 교보서점 스티커가 붙어 있다. 집이 은평구에 있는데 광화문까지 책을 사러 간다는 것은 동네 흔히 볼 수 있던 작은 서점을 다니던 중학생에겐 이례적 외출이었다. 그 시집은 명지사라는 출판사에서 1982년 출간된 <<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동화책 분위기가 나는 표지 그림에 시마다 들어가 있는 모던한 수묵화 감성 펜화는 매년 시화전 참여에 공을 들이고 있던 나의 눈이 머물지 않을 만큼 개성이 있다. 시집 앞부분에는 연희 전문 시절의 윤동주 사진이 몇 장 들어 있는데, 여중생은 시인의 반듯하고 온화하고 지적인 외모에 반해버렸다. 시를 읽으면 그 얼굴을 떠올라 청년 윤동주의 순결한 슬픔, 민족애, 겸허한 결단에 더 깊은 감동이 느껴졌다. 중 3을 앞둔 2월 어느 밤, 매일 즐겨 듣는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서 디제이는 바로 오늘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다가 스물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숙연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복받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이상할 정도였다. 디제이의 말이 현재 사건을 알리는 뉴스처럼 들렸던 것일까. 윤동주는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났고 평생을 독립을 염원하며 아픔 속에 살다가 광복을 채 반 년 남겨 놓고 억울하게 죽어야 했다. 그 날 밤 그런 윤동주의 순결했던 정신과 육체가 훼손되는 고통이 현실처럼 와 닿았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내 눈을 보고 놀라는 엄마에게 얼렁뚱땅 둘러대느라 애를 써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우리 학교 아이들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돌려 읽거나 스타 농구 선수들에 빠져 요란한 덕질을 하는 게 유행이었다. 남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윤동주의 시를 읽고 외워보고 감상문을 쓰거나 시인에게 편지를 쓰는 등 나도 나만의 사춘기 추억함을 나름대로 채워가고 있었다.
올해는 윤동주(1917. 12. 30~ 1945. 2.16) 서거 80주기가 되는 해이다. 나라 곳곳에서 그를 기념하는 행사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모처럼 나도 윤동주를 기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손 때 묻은 시집을 펼쳐들고, 저자 김응교 교수에게서 받아 놓고 읽지 못한 <<시로 만나는 윤동주, 처럼>을 같이 읽기 시작했다. 김교수의 온라인 강연도 신청했다.
어려서는 대중적으로 제일 많이 알려진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을 좋아했다. 다른 시들 중에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왠지 감상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있었다. 이제 조금 공부를 하고 보니 그 시들은 윤동주가 사랑한 사람들과 그의 고향, 그리고 그가 읽은 성경, 백석, 정지용, 그리스 신화, 맹자, 키에르 케고르를 알았어야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번에 윤동주 시집을 읽으며 이 글 첫 부분에 올린 시 <간판 없는 거리>가 처음 읽는 시처럼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1941년, 시인이 대학 4학년 때 쓴 작품이다. 졸업을 앞두고 세상으로 나가기 직전, 빼앗긴 조국의 현실은 엄혹하기만 하고 세계정세는 태평양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해 그가 남긴 16편의 시 중 이 한 편으로 청년 윤동주가 그리던 세상을 우리도 환상처럼 떠올려 볼 수 있다.
이 시를 썼을 때 윤동주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가장 번화한 도시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간판 없는 거리’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시 속에서 시인이 내린 플랫폼에는 손님들 뿐,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의 집들은 비슷비슷하고 그저 소박하고 평등하고 친근하다. 두드러질 것 없는 집들이지만 시인에게 이 마을은 정답고 익숙하여 집을 못 찾을까봐 걱정 할 필요가 없다. 모퉁이마다 켜 놓은 헌 와사등은 자애로운 마을 사람들처럼 따뜻하게 그를 환대한다. 손목을 잡으면 그들은 모두 어질다. 그들이 함께 사는 마을이다. 그런 이들과 그런 곳에서 순리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월을 살아가는 삶을 윤동주는 꿈꾸고 있었다.
윤동주는 만주의 명동마을을 떠올리며 이 시를 썼을 것 같다. 일제를 피해 먼 이국에 자리 잡은 동족의 마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았던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좀 더 넓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제국주의와 함께 밀려 온 이런저런 간판 같은 불편한 것들을 다 물리치고 조선인들끼리 평화롭고 어질게 예전처럼 살아가는 세상을 그린 시라고 본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김응교 교수는 어진 사람들의 ‘어질다’를 공맹이 논한 인(仁)의 세계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인’이라는 것은 논어에서 말하는 “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덕행이 높다”에서 그치지 않고 맹자가 강조한 ‘의’를 포함한 개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윤동주 시 속의 ‘어진 사람’이란 타인을 위한 참다운 용기를 가진 어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인의 삼촌 김약연이나 사촌 형 송몽규처럼 윤동주가 존경하고 그리워하고 아꼈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인의 사람들이었다.
천천히 시 전문을 다시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담담하고 따뜻한 안도가 전해진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 부옇게 푸른 와사등 불빛이 퍼지는 모퉁이 한 곳에 단정한 교복을 입고 돌아 온 윤동주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가 소망했던 세상에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