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를 앞둔 만삭 CEO의 월요일
2021년 12월 1일의 기록을 2022년 2월 17일에 공유한다. 내용이 정말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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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의 배를 달고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입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근무 일자를 세어보았다. '이번주 수요일까지는 출근이고, 목요일부터는 재택이다.'
출산을 약 5주 정도 남긴 시점에서 재택 근무에 돌입하려니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머리를 박박 감아대며 '아직까진 출퇴근 하는데 큰 무리 없는 것 같은데?' 라는 건방진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생각을 고쳐먹는다. 내가 설거지, 빨래, 청소를 하지 않아도 항상 집이 깨끗한 것, 매일 아침 늦게 출근해도 되는 것, 회사에서 걸어서 10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여성병원에 갈 때마다 큰 어려움이 없는 것, 무거운 것을 들거나 몸을 많이 사용해야하는 일에서 빠질 수 있다는 것, 내가 뚝딱뚝딱 저녁을 짓지 않아도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것,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지 않아도 항상 치워져 있는 것 ... 등 내가 누리는 여러가지 혜택과 배려를 생각해보면 '큰 무리가 없다'는 말에 나라는 점을 둘러싼 360도의 원 안에서 얼마나 잦고 빈번한 일상적인 희생과 배려가 있었는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큰 채로 자동차에 부릉 시동을 건다.
여성병원으로 운전하여 가는 길은 아주 순탄했지만 벌써부터 병원 주차장은 만차라 주변의 병원 연계 주차장에 주차를 해야했다. 건물의 4층부터 시작되는 주차장은 오르고 올라 4층을 도착해도, 자리가 없어 5층을 올라가도, 한 번 더 자리를 찾아 6층을 올라가도 만차다. '이야 이거 7층은 처음 가보네' 하며 7층을 들어서니 주차관리인으로 보이는 분이 "어디오셨어요?" 묻는다. "ㅇㅇㅇㅇ여성병원이요" 라고 했더니 차단기를 올려준다. 7층 주차장은 아주 널널하다. 널널해서 허탈할 정도다. 여기까지 올라와서도 목적지가 확실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주차장이었던가?
여성병원 안은 그 어느 날보다 붐빈다. 큰일이다. 이러면 모든 일정이 늦춰지는 게 불보듯 뻔한데. 일단 접수를 하고 내 순서를 기다린다. 접수를 마치고 가장 먼저 할 일은 예진실에서 혈압과 몸무게를 재는 것이다. 나는 만 35세 이상의 고령 산모라는 점, 심지어 이 나이에 초산이라는 점,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신 전부터 고혈압 환자였다는 점에서 '고위험 산모'가 될 수 있는 4가지 요건을 갖춘 초고위험 산모 중 하나이다. 그 고위험 인자들 중에서도 나를 가장 긴장하게 하는 것은 바로 혈압이다. 임신 말기에 들어선 이후로 '임신 중독증'이라는 무서운 증상을 피하고 예정된 분만일까지 건강하게 버티는 것이 2021년의 큰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임신 중독증은 임신으로 인해 모체가 다양한 변화를 겪는 중에 유독한 인자를 컨트롤 하지 못해 고혈압, 부종, 단백뇨, 시야흐림, 두통, 명치의 통증 등을 동반하여 산모와 태아 모두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증상이다. 임신 중독증의 유일한 치료 방법은 '임신의 종결(Termination of Pregnancy)'이라고 한다. 자연분만, 제왕절개 분만 등 일반적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뜻의 '분만'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delivery라고 말하지만, 임신 중독증의 치료에는 termination 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산모가 아이를 분만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생존보다 산모를 살리기 위해 임신을 중단시킨다는 뜻이다. 다행히 의학의 발달로 24주~28주에 태어난 아이들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지만 그 아이가 살 수 있는 확률은 현저히 낮아지고, 합병증을 갖고 평생을 살게될 확률은 반대로 높아진다. 그런 나에게 '혈압'이라는 팩터는 그만큼 부담스러운 존재다. 약을 먹으며 혈압을 조절하고 있고, 집에서나 내과에서나 심지어 현재 다니고 있는 이 여성병원의 동일한 기종의 다른 혈압측정기에서나 모두 안정적인 혈압이 나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여기 예진실 혈압측정기에 팔을 넣기만 하면 혈압이 튄다. 튄다는 사실을 알아서 더 튀는 것 같다. 이 튀는 혈압이 내 산모수첩에 적힐 혈압이고, 나의 주치의에게 전산으로 전달될 혈압이고, 나와 내 아이들의 건강을 반영하는 혈압이다. 오늘은 어떨까? 고민을 하다보니 띵-동 하고 내 대기번호가 뜬다.
'어 아직 안돼. 아직 도착한지 너무 시간이 흐르지 않았어. 더 앉아있다 재야지.' 그렇게 두 번의 대기 번호를 보낸 뒤 세 번째로 뽑은 대기 번호를 잡고서야 예진실에 들어간다. 간호사 선생님께 산모 수첩을 건넨 후 혈압측정기에 오른 팔을 밀어넣고 자리를 잡는데 오늘 따라 옷을 두껍게 입고 왔나 싶은 생각이 든다. 평소보다 수축기 혈압이 20이상, 이완기 혈압이 10이상 더 높게 나온다. 와 망했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15분 더 쉬고 다시 재자고 한다. 15분 더 쉬고 왔다. 달라진 건 없었다.
이렇게까지 와버리면 정밀소변검사에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소변을 채취하여 제출한 터라 그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변 검사 결과가 나왔는지 오랜 기다림 끝에 주치의 선생님을 뵐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평소의 웃음끼가 싹 사라진 채 "산모님 혈압이 왜이러지?" 하신다. 다행히 단백뇨는 하나도 검출 안됐어.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근데 혈압이 저번에도 그렇게 이번에도 신경쓰인다. 그러니까요. 전 예진실만 가면 혈압이 튀는데. 산모님 다리 부종 좀 보게 여기 좀 앉아봐. 다리 부종은 전보단 많이 나아졌어요. 그러게 이 정도면 부종 별로 안심한데.. 산모님 입원해서 좀 지켜볼까? 입원을 해야되면 해야죠. 산모님, 머리 아프거나 배 아프거나 시야가 흐려지면 병원으로 달려와야돼. 아 선생님 사실 저번주 토요일 저녁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타이레놀 먹고 잤어요. 그래..? 그럼.. 오늘은 입원하지 말고 먼저 피검사 좀 해보자. 그리고 이틀 뒤에 다시 와서 소변검사 피검사 한 번 더 해보는거야. 혈압이 자꾸 이러면 안돼. 피검사에 문제 있으면 연락 갈거니까 일단 채혈하고 가 알았지?
채혈을 했다. 안내 문에 알파벳이 적혀있다. CBC는 뭐고 LTE는 뭐지? 일단 사무실로 가려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의 와이프네 회사에서 확진자가 나와 PCR 검사를 받았는데 아직 결과가 통보되지 않았단다. 본인은 이미 출근해버렸으니 오늘 나는 회사에서 준비한 출산 선물만 비대면으로 받고 재택을 하는게 어떠냐고 한다. '엥? 웬 출산선물? 이제와서 낯간지럽게 뭔 출산선물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 피검사 결과가 어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물을 받는다니 또 기분은 좋다. 그래 조심하는게 낫지, 오늘은 재택으로 근무하자. 사무실 가는 길에 붕어빵이나 사다 주자. 붕어빵을 한 봉지 사서 사무실로 이동하였다. 사무실 문은 열려있었고 입구에 연보라색 종이와 조금 더 분홍빛이 나는 연보라색 리본으로 포장된 선물이 있다. 마스크를 꼭 낀채로 "이거 뭐야? 액자야?" 물어봤는데 일단 받아서 집에 돌아가서 뜯어보란다. 그게 어떤 히스토리를 가진 선물인지는 나중에 설명해주겠단다.
그렇게 나는 액자로 추정되는 선물을 하나 덜렁 들고 다시 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