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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오로 Oct 20. 2021

너의 생일을 위한 나의 이야기

출산의 기록

2021년 9월 23일. 39주 2일 차, 출산예정일 D-5.


23일로 넘어가는 밤부터 새벽녘까지.

    12시쯤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배가 사르르 아팠다. 원래도 새벽에 가진통이 조금씩 있었던 터라 그런가 보다 하고 잠들었는데 새벽 2시에 배가 아파서 잠에서 깼다. 가진통이 있긴 했어도 배가 아파서 잠을 깨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상했지만 곧 다시 잠들었다. 새벽 5시가 좀 넘어서 다시 배가 아파 일어났다. 다시 잠들기엔 신경 쓰일 정도로 배와 허리가 묵직하게 아팠다.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뒹굴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9월부터 지금까지는 연차를 사용 중이었고, 실질적인 출산휴가는 오늘부터였다. 랑랑이가 가성비를 아는 녀석이라면 출산휴가 첫 날인 오늘 나와야 베스트라고 농담 삼아 오빠랑 얘기했는데, 설마 랑랑이가 들었나 싶었다.


오전 7.

    시간이 지나도 배가 가벼워지지 않았다. 허리에 무거운 쇳덩이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듯 무겁고 아팠다. 심한 생리통 느낌이었다. 아픈 주기가 규칙적이지 않아 이전처럼 가진통이겠거니 생각했으나 한편으론 문득 '오늘은 아니 지금 당장 출산 가방을 챙겨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자고 있던 오빠를 깨웠다. 병원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빠에게 여행가방을 꺼내놓고 우선 출근해보라고 했다. 나도 이게 진짜 진통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고 하루라도 오빠의 연차를 아끼고 싶었다. 나는 허둥지둥 생각나는 것들을 가방에 싸고 오빠는 출근을 했다.


오전 8시.

    어제저녁부터 먹고 싶었던 롤케이크와 블루베리 요구르트로 아침을 챙겨 먹었다. 배는 계속 아팠그 와중에 맛은 있었다. 이 아픔이 진짜 진통인지 의심이 들 때쯤 드디어 나도 '이슬'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 이슬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무리 얘기를 들어도 모르겠더니, 정말 뭐라고 딱히 설명할 수 없지만 보자마자 그냥 아 이슬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오전 9시.

    밥을 먹고 한 숨 자려고 해도 간간히 아파오는 배가 신경을 건드려 잘 수 없었다. 아픔이 주기적으로 느껴진다고 생각될 즈음 진통 어플을 깔았다. 측정을 해보니 주기가 10분 안짝으로 반복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참을만한 아픔이라서 이것이 진통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약간 심한 생리통 정도의 느낌이었다. 어플에서는 병원에 갈 준비를 하라고 나왔다. 그 길로 샤워를 하러 갔다.


오전 10시 반.

    씻고 나오니 배가 덜 아픈 것 같았다. 건조가 끝난 빨래를 개서 마저 짐을 싸고 나니 어쩐지 별로 아픈 것 같지 않았다. 고 착각했다. 잠시 누워서 쉬려고 하는 순간부터 배가 조금 더 규칙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어플 상으로는 8분 정도 주기가 반복되었다. 경산모라면 병원에 가야 할 시간이지만 나는 초산이기 때문에 5분 주기가 반복될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괜히 일찍 병원에 가도 집에 가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어도 손에 링거 같은 것을 꽂고 진통을 버티는 건 더 싫었다.


오전 12시.

    가진통이 아닐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고, 남편에게 퇴근하라고 연락했다. 병원에서 진통이 오면 죽 같은 가벼운 식사를 하고 오라기에 오는 길에 죽을 받아오라고 했다. 어플에서는 6-8분 정도의 진통 주기가 떴다. 정말로 배가 막 아프다가도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귀신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오후 1시.

    남편이 집에 도착하고 요기 겸 죽을 먹었다. 먹으면서도 배는 계속 아프다 말다를 반복했다. 진짜 애가 나오려고 이러는 건가. 내가 진짜 애를 낳아야 하는 건가. 드디어 실감이 되는 것 같았다. 실감이 됨과 동시에 배가 아픈 강도는 점점 세졌다. 이제는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배가 아팠다. 이제는 정말 병원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현관 벨이 울렸다. 화장실 하자보수를 하러 오셨단다. 배가 너무 아팠지만 애가 있을 때보다 차라리 지금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조금 더 참아보기로 했다. 남편은 와이프가 진통 중이니 조금 서둘러 달라고 부탁드리고, 나는 소파에 애벌레처럼 아픈 배를 부여잡고 누워있었다.


오후 2시.

    다행히 하자보수가 15분 정도만에 끝이 났고, 수리해주시는 분의 순산하라는 말과 함께 떠나셨다. 자, 이제 진짜 병원에 가보자. 남편과 나 오직 둘만의 공간이었던 이 집을 마지막으로 한 번 둘러보고 무사히 셋이 되어 돌아오자는 각오와 함께 집을 나섰다. 병원까지는 15분 거리, 이제 거칠 것 없이 병원만 가면 되겠다 했는데,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서서 도무지 올라올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택배원 분과 시간이 겹친 것이 분명했다. 하필 지금! 그 짧은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고, 제발 택배 물건이 몇 개 없길 기도하는 와중에 우리 집 택배도 있었다. ㅋㅋㅋㅋ


오후 3시.

    마침내 병원에 도착했다. 추석 연휴 바로 다음 날이라 그런지 예약 대기 환자들로 가득했다. 마침 나를 봐주시던 의사 선생님께서 제왕절개 수술 중이시라 조금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분께서 나를 보시더니 아직 멀쩡한 것 같으시다며 집에 도로 갈 것 같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아플 때는 아프긴 했는데, 아프지 않을 때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멀쩡했다. 남편이랑 농담도 하고, 웃긴 얘기에는 웃기도 하고 했더니 얼굴이 별로 아파 보이지 않았는지 간호사님께서 복도 한 바퀴 걷고 오라고 하셨다. 한 바퀴 돌고 와서 배가 더 아프다고 하니 '진통이 맞긴 한가 보네, 가진통은 움직이면 안 아파'하셨다. 그때부터는 슬슬 배가 꽤 아프기 시작한 것 같다. 함께 대기하던 다른 임산부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오후 4시.

    의사 선생님도 내 얼굴을 보시더니 '아직 괜찮으신 것 같은데, 집에 갈지 분만실로 갈지 봅시다'하셨다. 난생처음 말로만 듣던 내진을 하는데, 진통보다 더 아팠다. 나도 모르게 으악 소리를 질렀다. 의사 선생님은 '자궁문이 벌써 3cm나 열렸다고, 많이 진행됐고 아팠을 텐데 오래 참으셨네요'하시면서 입원 수속을 진행해 주셨다. 속 골반이 좋고 진행속도가 빨라서 아마 이르면 오늘 저녁 늦어도 날이 넘어가기 전에 아기가 나올 것 같다고 하셨다. 진짜다. 진짜로 오늘 랑랑이가 나오는구나. 오늘 랑랑이 생일이구나.


오후 5시.

    신속진단키트로 코로나 검사를 마치고, 분만실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 나한테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어리둥절했고, 신기하기만 했다. 여기서 오늘 애가 나오는구나 구경하다가 잠시 몸을 일으켜 섰는데, 갑자기 밑에서 주르륵하고 물이 흘렀다. 설마 내가 긴장해서 그만 실례를 한 것인가. 하고 순간적인 수치심이 들었으나 이내 양수가 터졌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 터졌으니 망정이지 길가다가 혹은 차 안에서 터졌으면 조금 창피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와 내가 가진 어떤 근육으로도 컨트롤할 수 없이 양수가 죽죽 흘러나왔다. 이슬, 진통, 양수까지 낳는 증상 다 다. 이제 애만 나오면 되겠다.



오후 6시.

    본격적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생각보다 많이 아프지 않았다. 생리통이 엄청 심할 때보다 좀 더 아픈 정도의 느낌이었다. 진통 수치가 100을 찍었을 때도 '아!!! 좀 너무 아프다!!' 정도였지 '차라리 날 죽여줘' 정도는 아니었다. 무통주사를 맞기 위해서 등에 바늘을 꽂으려고 옆으로 돌아 누웠는데 등에다가 바늘을 꽂는 것이 진통보다 더 무서웠다. 이 정도만 아플 거면 그냥 무통 안 맞고 바늘 안 꽂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꾹 참고 바늘을 꽂고 나니 금세 자궁문이 4cm까지 열렸다며 무통주사를 놔준다고 했다. 별로 안 아픈 것 같은데 더 안 아프게 해 주신다니 일단 맞았다. 안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픔에 익숙해진 것이었는지 무통주사를 맞으니 세상이 밝아졌다. 내진할 때도 별로 아픔이 없었다. 이게 바로 무통 천국이군. 바늘 꽂길 잘했다.


오후 7시.

    진통 왔을 때 죽 먹고 오란다고 진짜 죽만 먹고 간 나 자신을 책망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아픔이 사라지니 배고픔이 오셨다. 지금 먹을 수는 없고 배는 고프고, 단 것도 엄청 당겼다. 병원 옆에 던킨이 있어서 남편에게 좀 사다 달라고 했다. 애 낳으면 먹어야지. 간호사님께 물어보니 자연 분만하고 나면 바로 국밥이 제공되니 조금 참으라고 하셨다. 와! 국밥? 소머리국밥인가? 칼칼하니 너무 좋겠다. '아니요. 미역국이요ㅎ' 아.. 나 이제 미역에 깔려 죽을 일만 남았구나


오후 8시.

    무통 효과가 끝나고 나니 배가 점점 아파왔다. 한 번 더 놔달라고 했다. 또 살만했다. 간호사가 수시로 와서 내진을 하는데, 자궁문 열리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고 했다. 10cm가 열려야 아기가 나오는데, 이 즈음 벌써 7cm 정도가 열려있었다. 힘주는 연습을 해보자고 하셨다. 무통 덕분에 배는 안 아픈데 힘은 들어가니 이렇게만 된다면 안 아프게 애 낳을 수 있겠다는 헛된 생각이 잠시 들었다. 헛된 생각이었다. 배가 아플  힘을 주니 무통이고 뭐고 너무 아팠다. 드디어 '차라리 날 죽여줘'하는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힘을 줄 때마다 남편 손이 터져라 부여잡았다. 나 혼자만의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옆에 있는 것이 생각보다 큰 힘과 의지가 었다.


오후 9시.

    갑자기 주변이 상당히 부산스러워지고, 의사가 들어오더니 남편을 밖으로 내보냈다. '배가 아프면 숨을 들이마신 채로 멈추고 힘주세요'하고 숫자를 세는데 숫자가 너무 길었다. 하나 둘 셋까지만 세지, 열까지 셌다. 다시 날숨 들숨을 할 틈도 없이 또 숨 멈추고 힘을 주라고 했다. 그 와중에 숨도 쉬란다. 지옥이 있다면 여기구나. 진통 중일 때는 그렇게 아프다가도 사이사이 아프지 않은 구간이 있어서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생각했는데, 진진통이 시작되니 이건 그냥 죽으라는 것 같았다.

    애기 머리통이 보인단다. 이제 세 번만 힘주면 아기가 나올 것 같다고 했다. 애가 나오는 느낌이고 뭐고 내 할 일만 했다. 랑랑아 네 동생은 없어. 내 인생에 임신과 출산은 네가 마지막이야. 마지막이니까 한다. 하는 생각으로 힘만 줬다. 분만실 문에 붙은 불투명 유리창 너머로 남편이 보였다. 남편 힘내라응원하는 소리 희미하게 들렸다.


오후 9시 10분.

    그만 줘도 된다는 말을 못 듣고 계속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가슴팍 위로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툭하니 올려졌다. 무언가로 범벅이 된 온몸과 얼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르르 떨고 있는 팔과 다리. 양수로 불어 터진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 와, 너구나. 너구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은 생명체가 응애응애 울고 있었다. 끝났구나. 끝냈구나. 어느새 남편도 다시 들어와서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신기했고, 뿌듯했고, 후련했다. 그리고 아팠다. 엄청.

 


2021년 9월 23일 목요일 21시 10분 새로운 인간이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다. 

아무 의미도 없던 9월 23일이라는 날짜가 이제 내 인생 내내 너의 생일로 되새김되겠지. 반갑다, 랑랑아.


PS. 낳아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넣어두라고 했던 거.. 취소할게. 매일매일 감사한 마음 최대치로 살아주렴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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