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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인 나에게 양보해

식탐왕 부녀의 돼지고기 쟁탈전

by 바오로

초등학생 때 나는 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키 작은 소녀였다. 마르고 작은 아이들이 대게 그렇듯, 나 역시도 밥 보다는 군것질을 좋아했고, 그나마 먹는 밥은 매우 소량이었다. 다행히 엄마의 손은 작은 편이었기에 두 딸이 잘 먹지 않아도 버려지는 음식은 없었다. 나의 키가 극적으로 자라기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는데, 극적으로 자란 것이 키만은 아니었다. 키가 자라면서 식욕이 커진 것인, 식욕이 왕성해져서 더불어 키가 자라게 된 것이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무렵 나는 정말 그야말로 엄청 먹었다.


나의 식욕이 날로 왕성해지면서 가장 위기감을 느낀 사람은 다름아닌 아빠였다. 아빠는 본디 食을 사랑하는 대식가로 엄마의 작은 손에서 탄생한 음식은 모두 아빠의 몫이었다. 그런 아빠에게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이었다. 각종 주전부리부터 반찬, 찌개까지 아빠와 나의 경쟁은 먹을 것 전반에 걸쳐 벌어졌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목은 엄마가 끓여 주신 김치찌개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김치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였다.


국물이 자작한 엄마표 김치찌개에는 다른 집과는 다르게 콩나물이 들어간다. 아빠가 좋아하는 할머니의 방식이다. 그래서 찌개국물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아빠와 나를 위해 엄마의 김치찌개는 칼칼하지만 맵지 않다. 국물에 자신의 양념을 모두 내어준 김치는 아삭함을 잃지 않고, 가지런한 두부는 보글 보글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그리고 그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돼지고기는 아빠와 나의 숟가락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다행이었던 엄마의 작은 손은 이 순간 세상의 가장 큰 불행으로 다가온다.


그 날은 유독 나의 숟가락이 허탕을 쳤고, 반면에 아빠의 입에는 연신 돼지고기가 들어가고 있었다. 아빠는 초조해 보이는 내 앞으로 이따금 고기를 찾아 올려 주었으나 그것이 고기를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마구 퍼서 먹고 싶은데 고기의 신은 아빠에게 향했으니, 잔뜩 조바심이 난 내가 와락 아빠에게 던진 간절한 한 마디.

나는 지금 자라는 중이잖아! 다 큰 아빠가 돼지고기 양보해! 제발!


아빠가 번 돈으로 엄마가 만든 김치찌개를 그런 당당한 말투로 양보하라고 하다니. 더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나의 마음이 100% 진심이었다는 거다. 깜짝 놀란 엄마와 황당해하는 아빠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서러운 표정에 아빠는 그만 고기를 내려놓고 다른 반찬으로 손길을 돌렸다. 그 이후로 우리 집 김치찌개에는 돼지고기가 아주 많아졌다. 음식을 두고 부녀 사이가 멀어지지 않길 바라는 엄마의 노력이었다.


보통 날 먹는 보통 음식이었던 엄마의 김치찌개는 이제 출가한 나에게 특별한 음식이 되었다. 다음 날 한 번 더 푹 끓여서 먹는 김치찌개는 더욱이 귀하다. 이번 주말에는 엄마에게 들러 김치찌개 한 그릇 얻어먹어야겠다. 이제 다 자란 나는 아빠의 밥그릇에 고기를 올려드릴 준비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때 아빠라는 경쟁자가 있어서 모든 음식이 더 맛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아빠로서 성장기인 딸을 위해 먹고 싶은 음식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나저나 나중에 내 자식이 나에게 음식을 양보하라고 하면 어쩌나. 그럴 자신이 아직 없는데. 아빠의 사랑을 따라가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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