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괜찮은 인생메이트_03
우리야 3개월간 충분히 서로에 대한 확신과 신뢰를 쌓았다고 쳐도, 양가 부모님들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았다. 하긴, 십 년을 만나고도 결혼하면 모른다는데. 고작 3개월 만나고 결혼을 하겠다고 하다니, 걱정을 안 하시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모아둔 돈이 넉넉한 상태도 아니었다. 철없는 생각이라 되려 혼만 나고 만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동거라는 선택지도 있긴 하지만, 나는 이 관계에 있어서 ‘살아보고 괜찮으면 살고, 아니면 말고’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의 장점은 그대로 취하면서, 의무나 책임감은 덜어내는 편안한 선택지.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동거의 이미지였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과 가족이 되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그것 보다 더 묵직한 ‘결의’ 같은 것이 필요하다. 고릿적 주례사의 한 대목처럼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함께 하겠다는 굳은 다짐 같은 것 말이다. 다행히 남편 또한 그런 사람이었기에 우리는 혼전 동거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결혼 허락받기’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먼저 우리 부모님을 만나 뵙기로 하였다. 남편은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고, 뒤늦게 들어선 엄마 아빠는 그를 발견하자 따듯하게 웃어주셨다. 이 자리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해 주시려고, 아빠는 열심히 대화를 이어 나가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즐기셨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 가족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 들어서 조금 시시해하는 이야기들을, 처음 들은 예비사위가 눈을 반짝반짝하며 열심히 들어주었으니까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설 때, 그는 이미 우리 부모님 마음에 가족이고 아들이었다. 다음으로 그의 집에 인사를 갔다. 정성스레 준비해 주신 과일상을 가운데 두고, 어머님은 조심스레 염려의 말을 던지셨다. 반대가 아니라, 애정에서 비롯된 ‘걱정’이었다. 그런 어머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과 함께 해도 어려운 일들은 생기기 마련이고 , 이 사람이라면 그럴 때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을 때는 물론이고 어려운 일들이 생기더라도 같이 잘 헤쳐나가 보겠습니다.’라는 식의 뻔한 이야기를 겨우겨우 했던 것 같다. 어수룩한 예비 며느리의 대답에 여전히 걱정이 가득하셨겠지만, 너그러이 마음을 열어주셨다. 덕분에 무난하게 식을 올릴 날짜 이야기까지 넘어갈 수 있었고, 아버님은 가만히 모든 대화를 듣고 계시다가 딱 한 단어를 뱉으셨다. “11월.”
그렇게 인사를 다녀온 이후 순조롭게 결혼식 날짜를 맞추었고, 상견례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 과정에는 우리의 노력 보다도 양가 어른들의 서로를 향한 배려심이 빛을 발했다. 서울과 군산, 마냥 가깝지 않은 거리에 성격, 성향도 제각각인 네 분이 ‘결혼’이라는 이름 안에 어우러지는 것을 보며, 우리가 닮아가야 할 모습이 바로 여기 있음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