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람 Jan 19. 2022

아버님의 수선화

깊고 진한 위로


제주의 겨울은 바쁘다.


들어는 봤는가 '감귤 방학'

제주의 대표 특산물 감귤의 수확철인 겨울이 되면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아이들도 일손을 거들 수밖에 없어 생겨난 제주의 이색 방학.

이젠 하우스 재배나 품종개량으로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다양한 귤이 생산되고 농사짓는 인구가 많이 줄어 감귤 방학은 사라졌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감귤 방학이 있었다.


추운 겨울 새벽부터 헌 옷 겹겹이 챙겨 입고 나서서 꽁꽁 언 손을 장작불에 녹여가며 겨우내 귤을 딴 경험이 있던 우리 또래들에게 결혼 기피대상 1호는 귤농사짓는 집 큰아들이었다.

주말마다 놀지도 못하고 귤밭에 따라나섰던, 혹은 겨울철 유독 바쁜 부모님의 관심이 고팠던 친구들과의 결혼 적령기 18번 대화가 '절대 귤밭 많은 집엔 시집도 가지 말자'였을 정도니까 말이다.


귤농사를 짓지 않는 집의 딸이라 감귤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던 고등학생의 내가 어느새 커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은 사이.

겨울철이면 제주를 노랗게 물들였던 귤밭에 아파트, 카페와 관광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그래도 여전히 토박이들 중 귤농사를 짓지 않는 집은 손에 꼽을 정도고 도시에선 은퇴해서 노년을 즐기는 시기에도 여전히 귤 수확철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 시어머님 덕분에 아직 내가 사는 제주의 겨울은 몹시 바쁘다.


그 바쁜 겨울의 어느 귀한 날.

오랜만에 어머님이 쉬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첫째 출산 후 4개월 동안 친정집에서 몸조리를 하고 돌아간 신혼집에서 한 달 만에 두 손 두발 다 들고 양가 부모님 댁과 5분 거리인 지금의 집으로 이사온지 벌써 6년째다.

아이들이 어릴 땐 18개월 차 아이 둘을 보기 버거워 양가 부모님께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애들이 좀 크니 아이들 스케줄 맞춰 움직이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양가에 들러 이야기도 나누고 밥도 먹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코로나로 귤 철로 참 뵙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참 귀한 오늘. 아이들 하원 시간을 좀 당겨 시부모님 댁으로 갔다. 어머님이 차려주시는 이른 저녁을 먹고 아버님의 퇴근을 기다렸다.


익숙한 아버님 차 소리에 "할아버지다!!!"라고 소리치며 신나서 방방 뛰는 아이들 사이로 진한 수선화 향기가 퍼져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신 아버님 손에 들린 수선화 한 다발.

퇴근길에 꽃 좋아하는 어머님이 생각나서 꺾어오신 수선화란다. 세상에.

정작 어머님은 너무 쿨하게 수선화를 건네받으시는데 나 혼자 너무 감동해서 어머어머 호들갑을 떨었다.


아, 그래. 이거였지.

내가 남편과의 연애시절에 아버님이 퇴근길에 고사리 한 움큼을 꺾어 빨간 노끈으로 리본을 묶어 고사리 다발을 만들어 가져오셨다며 보내온 사진에 놀랐던 그날의 감동.

한참이 지나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며 로맨티스트 아버님을 회상하니 봉지가 없어 끈에 묶어오셨다며 웃으시던 아버님이었지만, 아버님 이즈 뭔들!!!


역시 아버님은. ~ 사랑이셨다.

연애시절에 뵀던 아버님도 지금의 아버님도 늘 세상에서 가장 예쁜 건 너희 시어머니라며. 지금도 미스코리아 나가면 1등 할 거라며 어머님을 칭찬하시던 아버님.

아버님을 보고 미래의 내 남편을 꿈꾸며 내가 결혼을 더 굳게 결심했었지.

편의점을 가서도 절대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내 커피며 간식을 챙겨 오는, 맛있는 걸 먹으면 늘 나를 생각하고 다음에 꼭 데려가 주는,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소소한 선물로 감동 주는 내 남편은 역시 아버님을 닮았나 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님이 식탁에 꽂아놓고 보라며 전해주시는 수선화.

어머님 선물인데 제가 가져오면 어쩌냐며 한차례 거절했다가 어머님은 내일 또 꺾어오면 된다며 주시는 아버님의 수선화를 넙죽 받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화병에 꽂아 식탁에 두니 집안 가득 퍼지는 수선화의 향기가 내게 행복으로 와닿았다.


요즘 날도 춥고 뭔가 정리되지 않는 일상에 마음이 조급하고 불안해서 괜히 좀 우울했는데, 아버님의 수선화에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무엇보다  진한 위로가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연애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