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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Jan 27. 2022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멋쟁이 할머니가 될 테야.

65살의 나의 직업



벌써 또 한 달. 목글모 멤버들과 같은 주제로 글쓰기로 한 날이다.
어젯밤부터 내내 말라비틀어진 마스카라에 대한 글을 쓰려고 글감을 모으고 있었는데 오늘이 같은 주제 글쓰기 하는 날일 줄이야.

이번 달 주제는 65살의 나의 직업.
한 치 앞도 모르고 사는 세상에 65살의 직업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하얘진다.
어릴 땐 65살이 정말 너무도 먼 미래일 것 같고, 60은 커녕 반육십 서른 살조차 내게 없을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때가 있었다.
가끔은 이 모든 현실이 꿈같고 과거 같고 나는 머나먼 미래에서 왔는데 기억을 잃고 지금 현재를 다시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래서 너무 힘든 어느 날엔 갑자기 뿅 하고 기억이 돌아와서 꿈같이 아름다운 미래로 돌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공상에 빠져 살기도 했었다.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 바쁘게 너무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덧 서른여섯의 초입에 서있다.

대학시절 빼곡히 적어놓았던 인생곡선에서 서른여섯의 나는 열정적인 워킹맘이 되어 있어야 했다.
스물아홉에 결혼해서 서른 하나에 애 둘을 낳고 서른넷에는 사회로 복귀해 마흔에는 팀장급 자리를 꿰차고 있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쭉 일하고 공부해서 예순쯤에는 기관장, 교수 타이틀을 달고 예순다섯까지 정년을 꽉꽉 채워 일하다가 은퇴해서 한 10년쯤 놀며 쉬며 사회공헌 활동 열심히 하다가 일흔일곱쯤에 구구 팔팔이 삼사로 세상을 떠날 계획이었다.
내가 적어 놓은 인생곡선에서의 65살의 나는 많은 것을 이루고 즐길 일만 남은 행복한 시기. 직업이라 하면 건물주 겸 프리랜서 강사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른여섯 지금의 나는 스물아홉에 결혼해서 서른하나에 애 둘을 낳는 것 까지는 성공했는데, 서른넷에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사회로의 복귀를 못했다. 아니 안 한 건가.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다시 일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는데...

 꿈을 실현한답시고 아직 어린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일하러 나가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동안 온전히 내가 맡아온 육아와 살림을 뒤로하고 일하러 가려니 살림은 둘째치고 아이들 케어를 온전히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사실 처음엔 당연히 양가 부모님이 봐주실 거라 믿었다. 내가 어릴 적 할머니 손에 컸던 것처럼.

그런데 생각해보니 결혼 후 육아와 살림을 하며 지내는 동안 경력단절을 넘어서 무경력이 되어버린 내가.
사회로의 복귀 아니 다시 첫발을 내디뎌 얻는 수익보다 더 좋은 수익으로 안정적인 일을 하고 계시는 부모님께 아이들을 맡기고 나가는 게 옳은 것인가?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부모님께 다시 손주 육아를 맡기는 게 자식 된 도리로 할 일인가? 싶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조금 더 아이들을 내 손으로 키우겠다 마음먹었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인생곡선대로 흘러가지 못한 구간이 생겼고 나는 다시 인생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아이들 육아에 힘쓰고, 마흔전에 사회로의 복귀를 목표로 수정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전공 관련 일을 하고 싶었는데, 직업에 대한 생각이 조금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 잔혹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며 사는 건 하늘의 별따기라는 걸 깨달았다.

대학시절 우연히 읽었던 책에서 직업을 꼭 좋아하는 일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는 대목이 있었다.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게 조금 더 빠르고 간단할 수 있다고.
그때는 그 대목이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가 가진 생각에 가까운 글이었다.


그래서 직업에 대한 고민을 조금 더 간단하게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현재 상황에 맞고 안정적인 근무시간과 휴일이 보장된 안정된 직업을 찾겠노라고.

나를 좋아하고 행복하게 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기엔 취미만 한 게 없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면 잘해야 한다 완성해야 한다 하는 강박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고 만족하는 과정이나 결과물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온전히 즐기기에 어려울 수밖에.

사회로의 복귀를 잠시 미루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했을 때 시작한 그림모임은 내게 참 고맙고 의미 있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늘 무언가를 할 때 결과물, 목표치를 염두에 두고 시작하려다 보니 시작부터 어렵고 힘들었는데, 가볍게 낙서로 시작해 부담 없이 꾸준히 할 수 있는 취미를 다시 찾게 해 준 게 그림모임이었다.
육아하며 만난 동네언니들과 장난반 진담 반으로 시작한 그림모임 덕분에 취미를 온전히 즐기는 법을 배웠고, 결과보다 과정의 즐거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잘 그리지 않아도, 완성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저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시간. 그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즐거울 수 있는 나를 발견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드문드문 여러 핑계로 건너뛰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함께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는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즈음 나의 인생곡선은 몇 살에 어떤 것을 이루겠다.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아니라.
 "꾸준히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멋쟁이 할머니가 될 테야"
 "나이 들어도 호기심 많고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재미있는 행복한 할머니가 될 테야"라는.
어쩌면 두리뭉실하고 허황되어 보일 수 있지만 내게 쉼은 있지만 포기란 없는 아주 강하고 멋진 목표로 장식되었다.

65살의 나는 36살의 나처럼 매일이 즐겁고 내일이 기대되는 즐거운 삶을 살고 있겠지.
그때의 직업이 건물주 건 자율주행 차주건 로봇 고용인이건 백수건 그게 뭣이 중한가.
직업보다 더 좋은 멋진 취미를 가진 행복한 할머니일 텐데.

이 글을 빌어 그림모임, 꽃 모임, 글쓰기 모임, 머리채 모임 멤버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우리 할머니가 될 때까지 꾸준히 즐겁고 행복한 인연 이어 나가요~ 나 버리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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