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만2년 만에 3박 4일의 일정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결혼 전부터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꼭 여행을 가자고 약속했던 우리 부부.
아무리 바빠도 결혼 전에 여행은 꼭 한번 다녀오라던 결혼 선배들의 조언으로 우리 부부의 첫 여행은 시작됐다.
짧지만 강렬했던 2박 3일의 결혼 전 홍콩 여행을 시작으로 프랑스-체코 신혼여행, 대만 가오슝 태교여행, 단둘이 블라디보스토크, 여동생이랑 셋이서 오사카, 친정부모님과 함께 방콕, 우리 가족 넷이서만 쿠알라룸푸르.
결혼과 동시에 임신을 하는 바람에 둘만의 여행은 몇 번 가본 적 없지만, 그래도 돌아보니 정말 약속대로 1년에 한 번은 여행을 갔던 우리였다.
그러다 코로나 유행 직전 겨울에 예약해뒀던 2020년 3월의 마카오 여행을 취소하면서 멈춘 우리의 여행이 3월 말 일가족 코로나 확진으로 다시 시작됐다.
코로나 확진 전에는 정말 너무 불안해하기도 했고, 확진의 가능성을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어서 "만약 확진되면 우리 바로 해외여행 가자!!! 캐나다 가자!!! 유럽 가자!!!"라며 우스개 소리를 했었는데, 막상 확진이 되고도 해외여행을 생각하니 너무 겁이 났다.
아이들이 어린데 왜 항상 불안하게 해외로만 다니냐며 걱정하는 주변인에게 제주에선 항공권 구매금액의 차이만 극복하면 세계 어디를 가도 똑같다며 애들이 아직 어려서 룸 하나로 커버할 수 있을 때 해외 많이 많이 다닐 거라던 우리였는데... 코로나가 또 발목을 잡았다.
코로나 확진 이후에도 여전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쫄보는 고르고 고르다 결국 서울을 택했다.
서울. 대한민국의 수도.
아이들과 서울에 가면 무얼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오면 좋을까.
난 사실 서울 가면 백화점이나 돌고 맛집이나 한두 군데 가고 놀다 오면 좋겠는데.
딸은 롯데월드에 가서 공주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싶어 했고, 아들은 정브르 샵(유투버 정브르의 곤충샵)과 탱크(요즘 꽂혔다)를 보고 싶어 했다.
해외여행 갈 때는 영어도 못하면서 늘 자유여행으로 다니느라 분단위 여행사급 투어 일정을 짜고(여행 계획은 늘 내담당. 결제는 남편 담당) 다녔었는데 오랜만의 여행이기도 하고, 국내여행이라 맘 놓고 큰 틀만 짜고 이동하기로 했다.
남편은 너무 오랜만에 여행 가는 거라 감을 잃은 거 같다고, 짐도 너무 대충 싸고 계획도 없이 움직이는 거 같다며 내가 짠 일정에 그가 짠 일정을 보탰고, 새벽부터 일어나 나가자고 징징거리는 아이들 덕분에 우리의 일정은 3박 4일이 9박 10일 인 것처럼 벅차게 알차고 또 알찼다.
올해 초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돈 내고 타보는 지하철, 제주에선 거의 탈 일 없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며 거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도시의 풍경들. 코로나 거리두기 해제 직전 주말에 올라가서 해제 직후 평일 이틀을 보내며 우리는 참 많은 경험을 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오픈 시간에 들어가서 폐장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나온 롯데월드 지하철이었다.
폐장과 함께 출구로 나온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 역을 지나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역한 냄새를 맡았다.
아이들은 코를 막으며 "으악 똥냄새! 엄마, 이상한 냄새가 나요!" 하고 소리쳤고, 남편과 나는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자리를 이동했다.
뭐지? 난생처음 맡는 이 알 수 없는 냄새는?
문득 얼마 전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2021)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최근 읽은 책들이 너무 어렵고 힘들었던 터라, 깊이 고민하며 생각해야 하는 책 말고, 가볍게 읽을만한 책을 찾다가 베스트셀러 중 한 권을 골랐다.
서울역에서 노숙인 생활을 하던 독고라는 남자가 어느 날 70대 여성의 지갑을 주워준 인연으로 그녀가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본문의 '순간 노숙자 특유의 퀴퀴하고 역한 냄새가 코에 훅 들어왔다'라는 부분에서 막혔다.
독고씨의 냄새. 도대체 어떤 냄새지? 퀴퀴하고 역한 냄새 상상이 안됐다. 대체 어떤 냄새길래....?
책을 읽다 보면 글의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배경지식의 부재로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여러 번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찾아보고 공부하면 되니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읽다가 너무 어렵고 힘들면 그 책을 덮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감각적 경험의 부재에 따른 막힘은 참 답답하다.
'노숙자 특유의 퀴퀴하고 역한 냄새'
이게 이렇게 이해가 안 될 대목인가? 상상으로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느낌이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노숙자를 직접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 :
나는 36년 평생을 제주에서 살면서 참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
늘 가족과 친척,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관심과 보호 아래 자랐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엔 더더욱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만 만나고 하고 싶은 것들만 하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
내가 사는 이곳이 우주의 전부인 것 마냥.
문득 그런 내가 아이들을 '안전'이라는 명목 하에 제주라는 온실 속에 가두고 살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시여자가 키우는 제주도시아이들.
내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듯이 내 아이들도 늘 익숙한 사람과 익숙한 풍경 속에서 '경계 없이' 자란 덕에 서울에서도 오고 가며 만나는 사람들과 서슴없이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맛집 오픈런 대기를 하면서 만난 대구에서 온 어느 여행객과 개인정보를 모두 오픈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딸아이, 지하철 객차 안에서 전도를 위해 큰소리로 소리치며 지나가는 아저씨와 해맑게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하려던 아이들 , 서울역 앞 광장 구석에 굽은 등을 보이며 누워있는 노숙인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라고 묻는 아들에게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더니 "왜요? 왜 인사하면 안 돼요? 왜요? 왜 악수하면 안 돼요?"라며 묻는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여전히 해맑기만 한 아이들을 보며 걱정 반 한숨반 섞인 고민을 남편과 나누었다.
경계가 너무 심해도, 경계가 너무 없어도 고민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겠지만, 이토록 해맑은 아이의 웃음과 기대에 찬물을 끼얹으며 경계를 강요하려니 좀 서글펐다.
제주에서만 살면, 지금처럼 내 시야 안에서 늘 아이들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경계 따위 내가 더 신경 쓰면 될 텐데 아이들이 자라고 점점 내가 모르는 아이들의 시간이 길어지니 점점 더 불안해진다.
늘 정답은 없지만 최고보다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운 엄마가 되기 위해 오늘도 고민하고 노력해야지.
이번 여행을 통해 아이들도 많은 것을 경험하고 그만큼 또 성장했을 것이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차곡차곡 조금씩 쌓여감을 믿는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이들보다 나 스스로 더 많이 느끼고 생각하고 반성하게 된 시간이었다.
여행의 즐거움만큼 집에 대한 그리움도 커졌고, 작지만 소중한 우리 집이 주는 안락함과 안정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아이들의 성장에 따른 부모의 역할을 고민하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매일 밤 아니 매 순간 너무 좋지만 너무 힘들어서 당분간 여행에 '여'자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여길 만큼 우리 부부는 찐 고생을 했지만 아이들이 즐거웠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
여독이 풀리고 다시 '아.. 여행 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당분간 온실 제주를 만끽하며 우리는 우리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오늘을 만들어가야지.
그래서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