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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Apr 28. 2022

연필


목글모의 4월 공통주제는 ‘연필’.

연필이라는 단어가 낯설다. 연필보다 펜, 아니 키보드가 가까워진 요즘이니까.

그러던 중 올해 초,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주변에 연필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입학 준비물을 확인하다 연필. 그것도 2B연필로 준비하라는 안내에 조금 당황했었다.

우리 어릴땐, 4B 혹은 HB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사이 연필 종류도 참 다양해졌나보다.

매일 저녁 책가방 정리를 도와주며 연필을 살핀다.

아직 연필보다 색연필, 크레파스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 닳지도 않은 연필을 전동연필깎이로 깎아내며 내 어린날의 연필추억을 하나 꺼내본다.


연필보다 연필깎이에 대한 추억이라고 해야하나. 나 어릴 적엔 연필깎이가 참 귀했다.

특히 샤파에서 나오는 기차모양 연필깎이가 참 유행이었는데, 나는 이걸 7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

밤늦게 일을 마치고 온 아빠엄마가 잠자는 내 머리맡에 놓아둔, 하얀 전지로 꼼꼼하게 포장된 연필깎이가 나는 너무 좋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계기로 책상도 생기고 연필깎이도 생기고 내방도 생겨서 신났던 나.

그런데 당시의 기쁨은 온데간데 없이 그 이후의 연필추억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걸 보니, 연필깎이가 내 연필추억도 다 가져가버렸나보다.


연필깎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늘 아빠가 연필을 손수 깎아주셨다.

그러고보니 연필깎는 것도, 연필잡는 법, 글씨 예쁘게 쓰는 법까지 모두 아빠가 가르쳐주셨다.

손재주가 정말 좋은 우리아빠는 연필도 연필깎이만큼이나 예쁘고 뾰족하게 잘 깎아주셨다.

나도 아빠처럼 잘 하고 싶어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더니 아빠를 닮은 나도 제법 잘 깎게 되었다.

글씨도 참 삐뚤빼뚤 대충 적었는데, 공부보다 글씨 바르게 쓰기가 더 중요하다던 아빠에게 엄하게 배운 덕분에 의지를 갖고 쓰는(평소에는 날려쓰더라도) 글씨는 제법 봐줄만하게 쓴다.

연필 말고도 학교에서 가져오는 만들기 숙제는 늘 아빠와 함께 했었고(고무동력기, 과학상자 등 지금도 어려운 만들기, 조립류는 아빠가 거의 함께 해주셨다) 두발자전거도 아빠한테 배우고, 물건 옮길때 끈으로 묶어 쉽게 옮기는 법, 전구 갈아끼우는 법, 나사 조이는 법, 잘 풀어지지 않게 매듭짓는 법 등 아빠한테 정말 많이 배웠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겐 여전히 무뚝뚝하고 반응없는 아빠인데 손주에게는 그토록 온화한 미소로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걸 보며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린 딸에게 질투도 났다.

‘나는 아빠와의 추억이 별로 없는데’ 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생각보다 뚜렷하게 많은 추억이 있었다.


그러고보면 아빠와 엄마가 함께한, 행복한 기억의 ‘처음’이 참 많았다.

내 아이들에게도 늘 ‘처음’에 무게를 두고 좋은 인상을 남겨주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나의 ‘처음’이 부모님과 함께라서 참 든든했고, 안전했고, 좋았었기 때문이겠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님과의 시간이 어색하고 어려워지기도 하는 것 같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만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없으니 만날때마다 더 멀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그 거리와 어려움을 줄여줄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럴때 아이들은 정말 좋은 중간다리를 해주곤 한다.

내가 육아를 핑계로 양가부모님댁이 있는 서귀포로 이사온 이유.

나의 아이들이 조부모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자라기를 바라기도 했고, 나또한 더 많은 시간을 부모님과 보낼 수 있기를 바랐으니까.


오늘도 아이들 핑계삼아 아빠얼굴 한번 더 보러 가야지.

그렇게 애들 핑계로 아빠한테 투정도 한번 더 부리고, 엄마한테 한번 더 징징거리면서 요즘 아픈덴 없는지, 필요한건 없는지, 요즘은 뭐가 재밌는지, 먹고싶은 건 없는지 등등 여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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