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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람 Apr 14. 2022

고사리 장마

3월 말 흩날리는 벚꽃도 다 떨어지고 벚나무에 초록 새순이 돋았다.

분홍분홍 하던 나의 드라이브코스가 푸르러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고사리 장마가 시작됐다.


고사리 장마는 제주도에서 봄철 고사리가 나올 때쯤인 4월에서 5월 사이에 내리는 장마로,

따가운 햇볕과 여름 장마보다 적게, 강렬하게 내리는 비가 번갈아가며 내리면서 대한민국 최남단 제주의 명품 고사리가 본격적으로 자라나게 해주는 시기이다.

봄이면 벚꽃과 함께 묘하게 들떴던 기분이 고사리 장마와 함께 가라앉으며 날씨와 함께 묘한 피곤함을 가져다준다.

그래서인지 제주에서 나고자란 나는 유난히 봄을 참 많이 탔다.


4월. 신학기의 들뜸과 긴장감이 잦아들고 익숙해진 풍경과 루틴에 좀 루즈해지니 온몸에서 신호가 온다.

이번에도 역시 해마다 봄을 타는 몸과 마음이라 여겼다. 


신학기 한 달 동안 혹시라도 내 늦잠으로 아이들이 지각하진 않을까 걱정하느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는데 짧아진 내 시간에 짜증이 밀려와 자기 전 힐링 드라마 타임을 갖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서너 개의 알람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5분 만을 외치다가 마지노선 알람을 듣고 깨고 세수를 하자니 얼굴이 너무 퍼석하다. 건조하다 당긴다 정도의 푸석함이 아니라 진짜 바스러질 것 같은 퍼석함. 

복합성 피부라 선물 받은 유분기 있는 화장품은 쓰지도 못하고 엄마에게 양보했는데 나도 모르게 수분크림이 아닌 영양크림을 찾고 있었다.

여름엔 바디로션을 바르지 못할 만큼 끈적거리던 나의 유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코로나 이전엔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 따라 대중목욕탕을 드나들며 세신을 하고 때밀기 바빴는데 이젠 오일 스크럽으로 각질과의 사투를 벌이면서도 피부의 유수분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조금만 관리를 안 해도 큐티클이 쌓이고 건조함이 온몸을 장악한다.

애써 못 본 척 안 보고 싶은 나의 맨얼굴을 마주하노라면 눈밑 기미와 잔주름들이 인사를 한다.

세상에, 수분크림 하나면 충분하고 영양제 따위 챙겨 먹지 않던 젊었던 나는 어디 가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유산균부터 종합영양제, 루테인, 콜라겐까지 챙겨 먹는 서른여섯의 나를 마주하고 있노라니 한숨이 절로 난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반곱슬과 머리숱으로 두어 달에 한 번씩 매직으로 머리를 눌러줘야 했는데 코로나 격리 후 오랜만에 들른 단골 미용실 원장님에게 매직보다 새치염색이 먼저라며 컬러를 고르고 있다.


문득 세상에, '나 이제 진짜 나이 드는구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간간이 친구들과 만나면 우리도 이제 나이 든다 늙나 봐 이러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영양제와 화장품을 추천하긴 했지만 요즘처럼 훅 가는 느낌은 또 처음이었다.

여자는 한국 나이로 34살이 지나면 진짜 대놓고 늙는다는데, 아직 마흔도 안된 내게 이런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또래나 후배들보다 선배들과 잘 지내왔던 나는 어딜 가나 막내였다.

그래서 '지치다, 나이 드나 봐, 늙었나?' 뭐 이런 말만 하면 막내가 언니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핀잔을 들었다.

그래서 늘 나는 막내고 어리다고만 생각했나 보다. 

언니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아직 젊다며 나를 위로했었는데 요즘은 정말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사리 장마의 봄 타는 서른여섯이라고, 코로나 후유증이라고 애써 나를 위로하기엔 너무도 눈에 띄는 세월의 흔적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러다 오랜만에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나의 오래된 벗이자 나의 산소호흡기 같은 언니와의 통화를 하게 됐다.

그간의 안부를 묻다가 맥락 없이 갑자기 언니에게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언니!!! 근데 왜 말 안 해줬어? 서른여섯은 이런 거라고. 나한테 젊을 때 미리미리 몸도 좀 더 아끼고 고급 영양제며 비싼 화장품이며 잘 챙기라고, 노화방지 팁들 왜 하나하나 안 말해줬어. 나 지금 정말 늙었잖아~~~ 나 이제 어떡해~~~" 


언니는 한참을 웃다가 그동안 매번 다 말해줬는데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지난날의 나를 회상시켜줬다.


그래, 너도 그동안 웃고 넘겼던,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나이 듦의 현실 앞에 당도하게 되었구나.

언니는 슬프도록 잔인한 신체의 변화를 콕콕 집어 이야기하며 하나하나 주옥같은 현실적 대처방법을 알려주었다.


새치라고 말하기엔 이제 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염색이 아니면 감당이 어려울 것 같은 뿌염은 2주에 한 번은 해야 해서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미용실에서 매번 하긴 부담스러우니, 가까운 매장에서 조금 가격이 있더라도 좋은 염색약을 사서 집에서 부지런히 하고, 수분크림보다 유분기가 첨가되거나 영양, 콜라겐 등이 풍부하게 들어있는 조금 무거운 화장품을 바르고, 얼굴만 아니라 목과 손에도 발에도 고급 화장품을 듬뿍 발라주며 가꿔주고, 등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며.

젊을 때는 하지 않아도 됐던 많은 것들을 하나씩 먹고 바르고 챙기고 쉬어줘야 하니 쓸데없는 시간과 열정을 낭비할 때가 아니라며 더 많이 가볍고 간단하게 일상을 꾸려가야 한다고 조언해줬다.


아, 진짜 꿀 조언이었다. 언니와의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젊다고 어리다고 자만하며 내버려 두었던 나의 몸과 마음의 건강.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한동안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재미도 열정도 줄어드는 걸까? 싶을 때가 있었다. 

나는 절대 나이가 들어도 재미없게 살지 않을 거야. 늘 에너지 넘치고 호기심 많고 즐겁고 재미있는 삶을 살 거야! 라며 다짐하던 때.

언제까지고 나는 젊고 늙지 않을 거라 자만하고 늘 열정적인 내 모습을 기대했던 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재미와 열정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오래도록 함께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겠구나. 싶었다.

매일 하고 싶고 갖고 싶고 궁금한 거 투성인 열정 부자로 오래도록 남고 싶으면 나만의 속도조절장치가 필요하겠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덜어내고 더 많이 집중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다.


4월의 고사리 장마가 봄날 흩날리던 벚꽃잎 같은 나의 서른여섯의 가벼움을 지그시 누르고 명품 마흔의 나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며 오늘의 벚꽃잎을 눌러본다.

더 많이 덜어내고 집중해서 남겨진 나의 벚꽃잎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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