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종말의 날, 혹은 해방의 날

by 김보람


길고 긴 열흘간의 추석 연휴를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 10월 오후.

오랜만에 허파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내 생각이 난다는 그녀.

“그리움의 대상이 10여 년이 훌쩍 지난 우리가 함께했던 제주인지, 너인지,

그저 이 계절의 제주인지 모르겠지만, 네 생각이 나더라.”


나는 웃으며 답했다.

“그때의 제주에도, 지금의 제주에도, 앞으로의 제주에도

늘 그대로인 건 나니까.

언니가 그리운 건 결국 나인 걸로 하자.”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웃었고,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지난 연휴 이야기를 나눴다.


일을 시작한 뒤로 한 번도 연차 없이 열흘 동안 쉬어본 적이 없었다는 언니는

좋았던 만큼, 연휴 마지막 날이 마치 ‘지구 멸망의 날’ 같았다고 했다.

“풉— 나는 오히려 그날 밤이 딱 ‘지구 평화의 날’을 앞둔 것 같았어, 언니.”


나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같은 세상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거 맞지?”

언니는 깔깔 웃었다.

“하하하, 그러게. 이래서 세상이 돌아가는 거야.

누군가에겐 종말이고, 누군가에겐 평화니까.”

그 말이 괜히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이들과 함께 보낸 열흘.

방학이 아닌 이상, 아이들과 나흘 이상 24시간 붙어 있는 일도 드문데,

이번엔 재량휴업일까지 합쳐 꼬박 열흘을 함께했다.

학교도, 학원도, 나의 개인 시간도 모두 사라진 열흘 동안

삼시 세 끼를 챙기고, 놀리고, 재우느라 나는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연휴 넷째 날 쯤에는 ‘아, 이게 지구의 종말이 아닐까’ 싶다가,

마지막 날에는 자꾸만 올라오는 입꼬리를 애써 눌렀다.

우리 집에도 지구종말의 날을 기다리는 3인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해방이다!”

외치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언니는 그 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아, 정말. 너는 또 반대의 마음이었겠구나.

이래서 세상이 공평한 거야.”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누군가에게는 끝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시작이었다.

이래서 세상은 균형을 맞추며, 평균을 유지하며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언니의 말처럼, 세상은 언제나 반대의 감정을 품고 돌아간다.

누군가에겐 휴식이, 누군가에겐 고단함이고,

누군가에게는 끝이, 누군가에게는 시작이다.

어쩌면 인생은 그렇게 서로의 온도로 균형을 맞추며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평온이 누군가의 분투 위에 서 있고,

누군가의 해방이 누군가의 수고 끝에 찾아온다.

나는 그런 세상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쳐 있을 때 누군가는 숨을 돌리고,

내가 무너질 듯할 때 누군가는 다시 일어서니 말이다.

그리고 지구의 평균을 맞추듯,

나의 평균도 맞춰질 테니까.

오늘 힘들면 내일은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지쳐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도 전하고 싶은 말.


괜찮아요. 곧 나아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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