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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Aug 04. 2020

모험은 꿈에서나

 나는 강박증이 있다. 나는 나의 강박을 일종의‘정당방위’라고 믿는다. 나의 강박은 도처에 깔려있는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적극적, 공격적으로 취하는 자세, 혹은 미리 구비해 나쁠 것 없는 ‘보험’ 같은 것이다.


 강박이라는 틀에 나를 욱여넣고 가만히 자세를 낮추고 있을 때 나는 대체로 크고 작은 위험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었다. 매일 내 앞에 도사리고 있는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천만한 어떤 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건 나로서는 참을 수가 없는 일이다.


 나의 강박은 자동 반사적이다. 외출할 때는 짐가방을 챙김과 동시에 작동된다. 손으로 부지런히 더듬어 본다.

 가방 지퍼. 닫혀 있나?

 오케이.

 차 키? 오른쪽 주머니를 뒤진다.

 오케이.

 핸드폰, 지갑, 집 키는?

 애써 닫은 가방의 지퍼를 다시 연다. 오…케이.

 다시 가방의 지퍼를 닫는다.

 더듬어 본다.

 지퍼를 닫았나?

 차 키? 집 키? 핸드폰, 지갑은???


 걸을 때는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위아래 좌우를 바삐 살핀다. 아이들과 함께 길을 건널야 할 땐 항상 한 손에 한 명씩이다. 내가 아이를 더 낳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나에게는 손이 두 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딸 셋의 막내로 태어났다. 엄마가  말씀하시길,

“너는 온 가족이 외출할 때면 꼭 가족들 줄을 세웠어. 누구라도 잃어버릴까 싶어 어린애가 신경을 온통 곤두세우곤…식구들 머릿수 세느라 바빴지.”

 그때도 그랬나 보다. 큰언니? 오케이. 작은 언니? 오케이. 엄마, 아빠. 오케이.


 이런 병적인 행동을 나는 매일 어느 정도 하고 산다. 그러면 적어도 똥을 밟거나, 맨홀에 빠지거나, 방금 출금해 온 돈뭉치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일, 대문 앞에서 기껏 장 봐온 물건들을 무겁게 짊어지고 발을 동동 구르는 일 따위는 피할 수 있다. 나는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 아이들을 낳아 놓기만 하고 무책임하게 버려두는 엄마가 아니다. 나의 강박 덕분에 그들의 안전도 어느 정도 보장된다.(고 믿는다.)


 미디어를 대할 때도 다소 강박적인 면이 있다. 유튜브를 보다가 광고가 나오면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는다. 실눈을 뜬 채 재빨리 ‘건너뛰기’ 버튼을 누른다. 잘했어. 오늘도 나를 유혹하는 악마의 15초로부터 나를 구원했어라고. 광고 따위에 넘어가 장바구니를 채우는 주체적이지 못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광고 없는 유튜브 매달 $12.99)


 고등학생 때부터 내 베프들은 모두 영화광이었다. 그들이 그러니 나도 그런 줄만 알고 살았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볼 때마다 느꼈던 뭔지 모를 불쾌감의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나중에 깨달은 거지만 원인은 이거였다. 그러니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일 따위도 나에게는 위험과 도전, 곧 스트레스인 것이다. 영화의 자극적인 화면과 온갖 소음(!)이 온통 나를 집어삼킨다.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나 모르게, 내 뒤에서 나를 조종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간략하게 말해 나의 강박은, 내가 의도치 않은 사건과 환경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거나 휘말리지 않으려는 굳건한 의지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결코 패배가 아니다. 한계를 인정하는, 어떻게 보면 용감한 행동이다. 나를 압도하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이다. 압도하는 사람, 압도하는 소리와 압도하는 장면, 그리고 압도하는 분위기에 대해.


 그런데 모험이라니. 왜, 꼭, 누구나 모험을 해야만 하나.

 모험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위험을 전제로 한, 그러나 그것을 감수할 만큼 즐거운 어떤 일. 대관절 위험이 전제된 채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단 말인가?


 모험은 꿈에서나, 그래. 꿈에서면 충분하다.


 요즘 세상은 모두에게 모험을 강요하는 것만 같다. 모든 사람이 회사를 때려치우고 유럽과 아프리카로 떠나야 할 것 같다. 모든 여성이 브라와 메이크업을 벗어야 할 것 같다. 개성, 자율성, 다양성을 중시하는 시대라며 웬걸, 너와 나의 의견과 사상이 충돌하면 여지없이 등을 돌리고 날을 세우는 세상이다.  


 가끔 애기 엄마들이 아기의 수면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에게 묻는다. 나에게 묻는 이유는 첫째로 내가 자신들보다 아이를 먼저 출산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내 전공이 유아교육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대체로 이렇다.

“지난주부터 밤중 수유를 끊고 재웠더니 근 일주일 동안 8시간을 죽 자지 뭐야? 그런데 어제 갑자기 세 시간 만에 깼어. 똑같은 양을 먹이고, 똑같은 시간에 재웠단 말이야. 어쩜 이럴 수가 있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뭔가 전문가적인 답변을 기대했을 텐데, 그럴 때마다 내가 해주는 대답은 항상 똑같다.

 “니 애는 기계가 아니야. 인풋에 따라 아웃풋이 정확하게 나온다면 그게 기계지 사람이냐? 기계와 사람이 다르다는 건, 생김새가 각기 다르고, 그날의 몸상태, 그날의 기분, 그날의 의지가 다르단 뜻이야. 너는 매일 8시간씩 따박따박 자냐? 애기도 사람이야, 사람!”

그렇다. 우리는 사람이다. 모두가 떠나고, 때려치우고, 같아야 하는 건 아니다.


 나에게는 넷플릭스에서 ‘킹덤’을 보는 것이 큰 모험이다. 아이들의 손을 놓고 길을 건너는 것이 모험이다. 갔던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돌아오는 것이 모험이다.


 내가 나의 강박을 회개(悔改) 한다면 그건 단 하나의 이유에서 일 것이다. 강박은 내가 나 자신을, 세상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것처럼 세상 일도 예측 가능하지 않다. 통제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네가 나와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교만인 것처럼 나의 강박이, 신 앞에서는 교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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