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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Aug 24. 2020

발렌타인데이 러브레터

YS에게 보내는 편지

YS에게.


 어떤 말로 편지를 시작해야 할까요… 많은 젊은이들이 오늘 같은 날을 빌미로 근사한 레스토랑에 앉아 사랑을 고백하겠지요?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 실로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습니다. 결혼한 지 올해로 9년. 9년이라는 시간은, 연애시절의 뜨거움이 잊히기에도, 서로에게 무심해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당신과 처음 데이트했던 카페에서의 우리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 날 당신이 홀짝이던 밀크티와 상기된 당신의 얼굴, 그리고 우리가 나누었던 열띤 대화를 떠올립니다. 나는 기억해요.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반짝이던 그 날의 당신 눈동자를요.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유학생활은 정말 험난하고도 길었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니까요. 아이 둘에 군색한 살림으로 쪼들렸던 유학생활이 얼마나 추웠고 얼마나 매서웠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잖아요. 그래서인지 그 시절의 당신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하필이면 믹스커피랍니다. 학교에서 파는, 한 잔에 60 센트면 마실 수 있는 커피값마저 아끼려 집에서 싸 가지고 다니던 커피. 그러나 그때 믹스커피를 마시던, 자신을 위해서는 일전도 쓰지 않는 당신을 나는 너무도 당연히 여겼었던 것 같습니다. 목표하던 공부를 마치고 뉴욕에 취업이 되어 이삿짐을 쌀 때였어요. 못다 정리한 두껍고도 무거운 전공서적들을 보며 그 보다 더 무거웠을 당신의 어깨를 생각했었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택시 한 대 쉬이 잡아타지 않는 당신. 그런 당신의 어깨에는 나와 우리 아이들이 무겁게 올라 타있겠지요. 젊은 나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말처럼 그때 우리의 젊음으로 값을 치러 얻은 것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오늘은 미안하다 말하고 싶습니다. 믹스커피로 대변되는 당신의 유학생활을 당연히 여겼던 것, 그리고 그때의 힘듦과 고생을 별로 덜어주지 못했던 것을 말이에요. 나는 알아요. 당신을 정작 힘들게 한 건 가난이 아니었단 걸. 종종 실패를 마주한 당신에게 나는 미련했었습니다. 들어주기보다는 말했고, 보듬어 주기보다는 비난했으며, 도전보다는 포기를 종용했던 나였으니까요.


 닳아버린 구두 한 켤레 제 때 바꿔 신지 않는 당신의 발은 오늘도 바삐 움직이고 있겠지요. 당신에게 비한다면 저는 언제까지나 한없이 부족하고 철없는 아내입니다. 그러나 믿어주세요. 꿈꾸던 삼십 대의 당신은 이제 사십 대가 되었고 고된 사회생활이 당신의 미간에 간혹 주름을 만들지라도… 당신의 눈동자는 그 날의 카페에서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다는 걸,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런 당신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걸 말이에요. 가끔 함께 책 읽고 음악을 듣는 시간을, 나를 위해 피아노 쳐 주는 것을, 아이들 방에 조용히 들어가 걷어차 버린 이불을 덮어 주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발렌타인데이가 미혼남녀의 전유물은 아니잖아요. 오늘 밤엔 우리, 믹스커피 말고 밀크티 한 잔 해요.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애틋하게요. 그리고 그때처럼 벅찬 눈빛으로 얘기합시다. 앞으로의 꿈과 우리의 사랑에 대해 말이에요.


2018년 발렌타인데이에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2018 2 
뉴욕 라디오코리아 ‘꿈이 있는 풍경
발렌타인데이 특집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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