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G Aug 15. 2020

남을 돕는다는 두려움

그날따라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렌이 아니라.



뉴욕의 밤에 정적 따윈 없다. 밤마다 광기처럼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알고 싶지 않아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밤새, 불행을 실어 나르는 소리가 저 좀 알아달라는 듯 울부짖는다.


그러나 도시의 삶이란 각박한 것이다. 바득바득 살아가는 도시인들은 이웃의 불행을 빈번한 사이렌 소리로 대강 가늠해볼 뿐 남들의 깊은 사정에 대해서는 일절 관심이 없다. 더러운 골목길만큼이나 탁해진 가슴에, 타인을 위해 비워진 공간은 없다.


나는 다만, 우는 것이 귀뚜라미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돕고 사는 사람들. 살기가 팍팍해서라는 변명이 궁색한 이유는 폐지를 팔아서라도 남을 돕는 할머니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그들의 무모할 정도로 남을 생각하는 인정이 어떤 특별한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때마다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기부하는 얼굴 없는 천사도 있고 그 성금을 훔쳐가는 도둑놈들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극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그 중간 지대의 사람들이 있다.


나는 나를 중간 지대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왜 나에게는 그들을 그토록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아주 부유하게도 지지리 가난하게도 살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더욱 소설 <스타일> 속의  이서정을 깊이 동감했는지 모른다. 마놀로 블라닉 슈즈에 대한 욕망과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에 대한 착한 욕망 사이를 넘나드는 여자. 그러나 요즘 부쩍, 이런 욕망의 줄다리기만 하다 훌쩍 노인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럽다.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의 다복한 가정에서 자란 스물세 살의 케이티 데이비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우간다에 건너 가 열네 명의 여자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며 ‘엄마’가 되었다. 케이티는 우간다에서 매일같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수백 명의 어린이들을 돌보고, 홀로 자녀를 키우는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다. 아이들을 더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 그녀는 ‘아마지마’(Amazima)라는 비영리 사역 단체도 세웠다. 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를 나는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서정과 나처럼 그녀도 그랬다.


때로는 당장 쇼핑몰로 달려가 예쁜 신발을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엄마가 구워 준 초콜릿 케이크를 먹으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싶었다. 잠시 세상만사를 다 잊고 텔레비전 속으로 빠져들고도 싶고,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도 그리웠다. 내 차에 올라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사오고도 싶었다.
                                                                                        
                                                                                      
_케이티 데이비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그렇지만 그녀는 고백한다. 한때 누렸던 안락한 삶보다 누군가의 삶을 좀 더 낫게 만드는 일이 훨씬 더 기분이 좋았다고. 우간다에서 비록 그녀는 불편한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에 비해 만족감은 훨씬 더 깊고도 오래갔다고. 그녀가 말하는 '만족감'이라는 것은 흔한 봉사자들이 몇 번의 봉사와 적선을 통해 얻은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그녀는 완벽한 우간다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청하여 그들의 엄마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어준다는 것은 ‘나는 너랑은 달라’라는 경계와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콩 한쪽이라도 더 있는 이가 돕는 위치에 서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자주 그 알량한 콩 한쪽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내려다본다.



부자들이 제 돈 갖고 무슨 짓을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가난한 처녀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가난 그 자체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召命)이다. 거기다 맙소사. 이제부터 부자들 사회에선 가난장난이 유행할 거란다.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_박완서, 도둑맞은 가난


연탄 반 장을 아끼려고 상훈과의 동거를 결심한 나. 그러나 사실은 상훈이 부잣집 도련님이고, 나와 함께 빈민골에서 살았던 것은 일종의 ‘빈민체험학습’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여봐, 이러지 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소리를 정신차리고 똑똑히 들어.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보시는 바와 같이 대학생이야. 아버지가 좀 별난 분이실 뿐이야. 방학동안에 어디 가서 고생 좀 실컷 하고, 돈 귀한 줄도 좀 알고 오라고 무일푼으로 나를 내쫓으셨던 거야. 알아듣겠어.

어제까지만 해도 빈민골의 동기였던 상훈이 오늘 깨끗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등장했을 때 주인공이 느꼈을 당혹감과 절망감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녀가 절망한 까닭은 상훈이 부잣집 도련님이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들의 가난을 희롱한 때문이다. 연탄가스 냄새와 5원짜리 풀빵으로 대변되는 가난을, 한 이불에서 함께 버틴다 생각했던 가난을. 그가 멕기 공장의 동기들을 가난뱅이라고 불렀듯 상훈은 그녀를 속으로 동정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만 자신의 삶에 흥미를 더해 줄 하나의 에피소드로 삼았던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이, 탄생과 동시에 주어진 가난이라면 더군다나 누구도 그걸 희롱하거나 업신여길 권리는 없다. 작가의 말마따나 누구나 혀를 찰만한 자신들의 가난을 오히려 친근하게 동반하고, 용감하게 살아내는 그들을 누가 어찌 멸시할 수가 있는가. 남을 돕는다는 미명美名 아래 그걸, 삶을 한층 다채롭게 만들 에피소드로 삼는 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두렵고, 두려운 일이다.


들려오는 불행의 소식들이 차고도 넘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때 지하철에서 만난 노숙자 아저씨의 발작과 오줌 지린 바지, 오늘도 가라지(Garage)에서 마리화나를 피는 아랫집 틴에이저들의 허망한 눈동자가 있다. 이러한 불행과 아픔의 상像들이 가슴에 잠시 머물렀다 이내 물러간다. 물러나는 건지 몰아내는 건지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그들의 가난과 아픔과 고통에 진정으로 참예할 수 없다면…이라고 변명해 본다.  엄마가 되어줄 수 없다면…이라고 변명하여 본다.



오늘 밤에도 사이렌 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전 19화 와식생활(臥式生活)의 달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