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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Jul 23. 2020

와식생활(臥式生活)의 달인

 요즘 예능은 유명인들의 일상생활을 담아내는 ‘관찰 버라이어티’가 대세인 것 같다. 자연히 그들의 생활습관도 엿보게 되는데 그중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눕방’(누워서 하는 방송)이니, ‘와식생활’이니 하는 것들이다. 믿거나 말거나 가수 조정치는 24시간 중에 20시간을 누워있을 수 있다고 한다! 나도 눕는 데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으로서 이런 자를 보면 괜한 도전의식이 느껴진다.


 자랑은 아니지만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우리집은 ‘와식생활’이라는 말을 사용해왔다.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생 때,

 “입식(立式)은 서서 생활하는 방식, 좌식(坐式)은 앉아서, 그렇다면 누울 와, 와식(臥式)은 우리처럼 누워서 생활하는 걸 의미하지 않겠니?”

 작은 언니가 웃고 떠드는 우리를 향해 잘난 척을 하며 던진 말이었다.


 와식생활의 달인(達人). 어떤 기예든 달인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범인과는 차별되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달인은 누워서도 먹는다.(사실 뭐든 절대로 누워서 먹어선 안된다. 주의하시길! ‘누워서 떡 먹기’는 결코 쉽지 않고, 누워서 먹다 기도가 막히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 나는 누워서 먹고, 누워서 손톱 깎고, 누워서 책 읽고, 누워서 글씨를 쓸 수 있다. 화장실이 급하거나 외출 준비를 해야 하는 등 몸을 직립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누워 지내는, 나는야 와식생활의 달인이었다.



부작용 1.

 내 몸은 그야말로 눕기에 최적화되어, 바른 자세를 위해 필요한 근육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서 있을 때는 짝다리를 짚고, 앉을 때는 다리를 꼬았다. 와식생활의 부작용을 어렴풋이 인지하기 시작한 건 뜻밖에도 결혼식 날이었다. 주례사를 들으며 많은 하객들의 주목을 받아야 했던 그 날에, 나는 꼿꼿이 서 있지 못하고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우리 부장님은 내 동료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저거, 저거 왜 저래? 쟤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냐?”

라고 말했다 한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몸을 휘청댔으니 호들갑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도저히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나는 속으로 무척 당황스러웠다. 똑바로 서는 것, 이게 뭐라고 이렇게 어려운 걸까.


“머리는…잘 때만 침상에 대는 거라고 배웠는데, 어쩜 그렇게 하루 종일 누워있어?”

 결혼 이후에도 이러한 생활 방식을 고수했으므로 남편은 가끔씩 나를 외계인 보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공부하다 피곤할 때도, “눈 좀 붙일게.”라고 말한 뒤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조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런 남편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나는 누운 채로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왕 쉴 거 시원~하게 눕지 뭐하러 그렇게 불편하게 그래?”


 하지만 나의 이런 신념과 자신감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몸이 여기저기에서 고장의 징조를 보였기 때문이다. 직립을 위해서는 몸 어딘가에 반드시 힘이 들어간다. 배와 허리에 붙어 있어야 할 나의 근육들이 모조리 목 뒤쪽에 몰려있었다. 돌처럼 굳어진 승모근은 목뼈를 눌렀고 나는 이따금씩 목 보호대를 차고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서 있는 자세가 불량하다 보니 발바닥도 수난이었다. 나의 발바닥에는 언제서부턴가 항상 티눈이 박혀 있었다. 연고도 발라보고 반창고도 사서 붙여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을 뒤지다 티눈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구부정한 자세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한쪽으로 기울여 서서 발바닥 전체에 압력이 고르게 분포되지 않을 때 생기는 질환이라는 거였다.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바르게 서고, 바르게 걷는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했다. 거짓말처럼 티눈은 점점 작아지고, 제거하기도 쉬워져 나의 ‘직립보행’은 훨씬 편안해졌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바로 위장장애다. 누워서 먹는 사람은 먹자마자 눕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먹고 바로 누우면 소화가 안되고 심한 두통이 왔다. 소화가 안돼 잘 먹지 못하면 더 기운이 빠지는 법. 그러면 다시 눕게 되는 악순환이었다.


부작용 2.

 와식생활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루 종일 누워있으면 몸도 머리도 무겁다. 나는 종종 의욕이 없었고 가끔 우울감을 느꼈다. 잠시 몸을 일으켰다가도 또 눕고, 누우면 자고 싶고, 자면 더 자고 싶었다.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행동으로는 잘 실행되지 않았다. 때론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아이 둘을 낳은 이후 나의 기동력은 더욱 약해졌으므로 나는 더 안 걷고 틈만 나면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신세를 한탄하기만 했다.


 몸과 마음이 자꾸만 피폐해지자, ‘이제 판단을 내릴 때다. 내 삶을 일으키기 위해 작은 무언가라도 실천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과 동시에 나는 빌빌 거리며 도서관으로 가 몇 권의 책을 빌렸다. 그중의 하나는 모기 겐이치로의 ‘아침의 발견’. 나는 즉시 '누워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에 보면 인간 행동의 90퍼센트를 관할하는 곳을 ‘이마앞엽’이라고 하는데 이곳을 단련하는 방법이 다름 아닌 ‘운동’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뇌는 많이 걸을수록 건강해진다는 것이다(뇌 건강에는 호두를 먹는 게 최선인 줄 알았었다).

 게다가 운동할 때 뇌에서 분비되는 ‘베타 엔도르핀’은 기분을 좋게 만들고, 암세포를 파괴하기도 하며 기억력을 강화하기도 한단다. 거꾸로 말해, 누워만 있는 나의 뇌가 건강할 리 만무하다는 얘기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는 정말 일어나 좀 걸어야 할까. 세상에는 와식인들만 있는 게 아니다. 저마다의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걷고, 뛰는 자들이 있다. 문득 산티아고의 순례길이 떠올랐다. 800km나 되는 길을 오로지 두 발로 걷는 이들. 그 자체만으로 그것은 '순례'이다. 그래, 순례자의 정신 상태와 나 같은 인간의 정신 상태가 같을 리가 없지. 또, 그들의 뇌는 얼마나 많은 베타 엔도르핀을 분비해 낼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은 숲 속의 산책로 페리파토스를 ‘거닐면서’ 철학을 토론했다고 한다. 그의 학파는 그래서 소요학파(peripatetic)라 불린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정신이 뇌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더욱 잘 사유하기 위해 걸었다.(우리는 날마다 진화하려 발버둥 치지만 기원전 그들의 지혜를 주목해 보자면 놀라울 따름이다.)


 산티아고를 걷든, 페리파토스를 걷든, 이들은 모두 다리로 정신을 움직이는 자들이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육체도 정신도 퇴보하고 마는 것이로구나. 이제 정말 나는 와식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최근 우리 아빠는 누워만 계신다. 알츠하이머로 인해 스스로 설 수도, 앉을 수도 없게 되셨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빠의 뇌와 육체를 이전의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다. 나의 와식생활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빠는 지금 눕고 싶어 누워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된 이상 더더욱 나는 나의 와식생활에 진절머리가 난다. 스스로 앉고, 일어서고, 걷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누워 계신 아빠를 통해 처절히 깨닫고 있기에 그렇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대로 눕는 생활이 가져다주는 즐거움보다 그 뒤에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부작용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와식생활 방식을 아주 버렸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천만의 말씀, 아직도 나는 틈만 나면 누울 궁리를 한다. 사십여 년을 유지해온 습관. 몸이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다가도 5분만 지나면 구부정해진다. 아직도 서 있는 것보다는 앉는 것이, 앉는 것보다는 눕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저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서고, 걷고, 건강히 살고 싶은 마음은 굳건하다. 이제 사십대에 접어들었다.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서야 한다.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할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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