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느꼈던 복잡 미묘한 감정을 나는 여직 또렷이 기억한다. 사람의 인생이 이다지도 덧없단 말인가, 행운과 불운은 어쩜 이리도 밀접히 맞대어 있단 말인가. 아직 어렸지만 짧은 소설 한 편을 통해 인생 맛을 다 본 것 같았다.
결국 김첨지의 마지막 대사는 나를 울렸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 질병, 재난과 같은 불운이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한꺼번에 찾아온다. 김첨지가 평상시 자신을 더럽게 운 없는 사람으로 여긴 것처럼, 유독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이 있기는 있다. 그가 그날을 ‘운수가 좋은 날’로 여긴 것은, 게다가 그것이 괴상하기까지 했던 것은 그런 행운이 그에게는 더디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찾아온 행운을 양껏 누리기도 전에 그는 자신에게 닥친 더 큰 불운을 인식하고 만다.
김첨지는 줄곧 불행했기에 다가온 행운이 유난히 불길했겠지만 이런 불길한 감정은 비단 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느낄 수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엎치락뒤치락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혼란에 빠진다. 무섭고 불안하다.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하는 의문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벽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입동> 김애란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은 지겨운 셋방살이를 끝마치고 마침내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한다. 집값의 반 이상은 대출로, 그야말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하여 장만한 집이다. 밤마다 그는 이상한 자부심과 불안감에 피로했다고 토로한다. 그나마 집이 있다는 안도감이, 아내와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그를 기쁘게 했다. 그의 아내는 반년 이상을 인테리어에 공을 들이며 정성을 쏟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때, 내 집 장만의 기쁨을 누리고 있던 바로 그때, 부부의 아이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죽는다.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참척을 보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들을 먼저 보낸 소설가 박완서도 생전에 그의 책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그렇게 말했다. <입동>에서 주인공 부부에게 닥친 비극은 마치 그들에게 찾아온 행운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들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모양을 하고 찾아왔다.
왜 그들은 집을 얻자마자 아들을 잃어야 했나. 운수 좋은 날 , 김첨지는 왜 아내를 잃어야만 했나.
뻔한 대답 같지만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리고 닥쳐오는 운명의 장난을 막아낼 재간이 없다는 것도 팩트다. 무방비로, 맨 몸으로 서 있다는 것도.
4년 6개월 만에 남편이 이직에 성공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가 새로운 직장으로 첫 출근하는 날이다. 오퍼 레터에 사인하는 날 우리 부부는 매우 기뻤다. 그런데 나는 동시에 불안했다. 이러한 기쁨 뒤에 어떤 불행이 찾아올지 몰라서였다. 일하지도 않은 몫을 미리 받는 것을 가불이라고 하는데 나는 가끔 불행을 가불 한다. 오지도 않은 불행을 땡겨 미리 받는 것이다. 불행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지만,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 또한 불행이나 다름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첫 출근을 준비하는 남편에게 말했다.
“너무 좋아하거나 기대하지 마. 미친놈들은 어딜 가나 있어.”
찬물을 끼얹는 나의 이런 발언에도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커피를 챙겨주고 남편이 운전하는 차의 뒤꽁무니가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따라가며 나는 불길함을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듯 괜히 불길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신께 매달리는 일이다. 내 영역 밖, 능력 밖의 일을 돌보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면, 신과 인간의 관계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와 신이 다를 바가 전혀 없다면 그런 신은 믿을 필요도, 매달릴 이유도 없다.
두 번째는 행운과 불운의 개념을 바꾸려는 노력이다. 취직, 이직, 내 집 장만, 건강을 행운으로 삼고 살다 보면 행운보다는 불운이 더욱 자주 찾아올 것이다. 집 한 채 없어도, 내로라하는 직장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 <교회 오빠>를 통해 보아 알고 있다.
그러면 두려움은 어떤가, 다가올 고난 앞에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두려움은. 나는 신을 의지하지만 글도 의지한다. 작가 이응준은 말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추한 사람이다.
사람은 두려움을 배우며 사람이 된다.
두려움은 겁쟁이의 감정이 아니다. 비열한 태도가 아니다.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실로 용감한 사람이 된다.
작가가 그렇다니 그런 거다. 두려움을 배우면서, 불길함에 맞서 싸우면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살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처방이다. 남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불길하지만, 남편이 첫 출근을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오도록 기도해야겠다. 막상 회사가 별로라도 실망하지 않기로 작정해야겠다. 나는 두려운 게 많아서 용감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