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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Aug 22. 2020

용기와 자족

하루를 살아낼 용기勇氣. 그만큼의 용기勇氣를 담아내는 용기容器의 크기는 저마다 달라서, 누구는 소주잔 만한 용기로도 하루를 넉넉히 이겨내고, 양동이 가득 채운 용기로도 하루를 살아내기 벅찬 사람이 있다. 나의 하루에는 엄청난 사이즈의 용기가 필요하다. 걸핏하면 공황장애가 오고 멘탈이 붕괴되는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고작 10살짜리들에게 주저 않고 귀싸대기를 날리던 용감한 여자가 나의 담임이 되었던 날부터, 세상이 녹록지 않을 거란 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삶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서른이 훌쩍 넘고 난 뒤부터다.


나의 용기

오래간만에 아이들에게 아침으로 줄 팬케익을 굽다 흠칫하고 말았다. 팬케익 위로 우리 아이들의 얼굴이 비쳤기 때문이다. 적당한 온도, 적당한 타이밍에 뒤집지 않으면 타거나 덜 익어 들러붙는 팬케익. 잠시도 불 앞에서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되고, 적당한 때 뒤집어 주는 등의 조치가 필요한 팬케익처럼 아이들도 그렇다. 무섭고 지긋지긋하다 생각되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팬케익을 부치며, 엄마로서 내가 지녀야 할 용기에 대해 헤아려 보았다.  


아픈 아빠를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 최근에 새로이 요구되는 용기이다. 암만 가족이라도, 서로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게 마련이다. 아빠에게 받았던 상처의 크기와 상관없이 아빠를 마주 볼 용기는 충분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그릇을 더욱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무처럼 말라 굽어버린 아빠의 다리. 영양공급을 위해 식도로 연결된 콧줄, 초점 없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기란 딸로서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 아빠를 제대로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좀 더 큰 용기容器에 용기勇氣를 담아내야만 한다.


엄마로서, 딸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는 그나마 헤아릴 만하다. ‘크리스천으로서의 나’,  ‘이민자로서의 나’, 지금처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읽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 그리고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내 이름 석자로서의 순수한 ‘나’로 살아갈 용기. 이런 수많은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마흔을 앞둔 나의 목표이다.


너의 용기

주변인들의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싱글맘 N이 얼마 전 나에게 물었다.

“한국 사람들은 혼자 애 키우고 사는 나 같은 여자들을 무시한다던데 사실이야?”

“왜? 무슨 일이 있었어? 모든 한국인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한국인이 없지는 않겠지…”라고 얼버무려 버렸다. 그녀에게는 한창 뛰어 놀 나이의 두 아들이 있다. 층간소음이 걱정되긴 했지만 아랫집의 아무런 경고가 없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아랫집에서 다짜고짜 경찰을 불렀다고 했다. 아랫집 사람들은 한국인이었다. 그런 태도는 한국인의 싱글맘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고, 한국인인 내게 무심한 듯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싱글맘. 그녀의 용기에 대해 생각한다.


동성을 사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 C를 떠올린다. 대만계 Canadian인 그가 미국이라는 또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서, 성적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용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렵게 레슨 일을 구하고도,

“당신의 아이를 가르칠 선생님이 게이(gay)어도 괜찮습니까?”

라고 먼저 물어야 할 때나, 남자가 남자와 손을 잡고 걸어갈 때의 뜨거운 눈총에 대해서. 나는 단지,

“우리 아들의 바이올린 선생님은 게이예요.”라고 말하는 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용감해질 거라 기대했었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아는 게 많은 어른일수록 용감하지 않다는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를 가리키는 더 많은 수식어가 들러붙는다. 그리고 그 수식어에는 뒤따르는 책무가 있다. 우리는 이를 용기 있게 받아 드리거나 회피해 버리는 수밖에는 없다. 나는 이러한 수식어들을 무겁게 받고 이왕이면 잘 감당하고 싶다.


모두가 나 같은 마음이라면 좋겠지만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 것도 나이 먹은 사람의 미덕이라 생각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나약하기 그지없어’, ‘죽을 용기로 살아라’라는 말을 들을 때, 그러한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 사람의 용기를 생각한다. 날마다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의 부피가 변하듯 사람마다 일을 헤쳐나갈 때 필요한 용기의 부피도 각기 다르다. 남의 삶과 입장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용감하나 그러므로 무식하다.


과거의 좌절, 오늘의 좌절, 내일 닥쳐올 좌절. 누구에게나 좌절의 순간은 점선처럼 이어진다. 그렇지만 딱 하루의 분량만큼만, 그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용감해지면 어떨까. 아들러(Alfred Adler)가 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기울이지 말고, 매일매일 나만의 고유한 인생을 꾸려 나가면 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고 거기에 미치지 못했을 때 좌절한다. 누가 뭐라 해도 꿈쩍 않는 자존감의 사람, 자족할 줄 알며 자신을 행동하게 하는 동인이 다름 아닌 자기 안에 있는 사람. 그래서 너와 나를 비교하지 않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만 저울질해보는 사람. 마흔에는,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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