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 목소리 들리세요?”
“네! 네! 들려요!”
“그럼 지금 무사히 2층에 올라오신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 문의 아랫부분이 어디인지 두드려보실 수 있으시겠어요?”
“여기! 여기요!”
“그럼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걸린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여기서도 그쪽이 아랫부분이거든요. 걱정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네! 네! 그럴게요!”
지난 토요일. 엘리베이터에 갇힌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순간 영원히 이곳을 탈출할 수 없을 것만 같고,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의 산소가 고갈되어가는 것 같고, 언제 추락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하늘이 노래졌다. 공황장애 였다. 이렇게 된 이상 1분 1초도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빨라진 심장이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폭주하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주저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차분한 톤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교인 중의 한 분이었다. 단지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구출될 수, 아니 그곳에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정작 고장 난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어 준 사람은 그 곁의 ‘다른 이’였지만 처음 나를 진정시킨 것은 목소리,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내 앞에 서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왕복 8차선에서 난 차 사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차는 볼품없이 찌그러졌기 때문에 조수석에 탄 나를 끄집어내기 위해선 도끼로 문을 부수어야 했다. 그러나 구급대원이 처음 나를 ‘구원하기 위해’ 던진 것은 도끼가 아니라 ‘말 한마디’였다. 911과 경찰이 우리를 구조하러 왔을 때 나는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뒤섞여 정신이 혼미했다. 노련한 구조대원은 내게, ‘곧 도끼로 문을 부술 것’이며 ‘그건 별것 아닌 일’이라고 말해줬다. 문을 부수고 나서도 네가 혹시 한국에서 왔는지 궁금하다고, 자기는 한국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고 말해줬다. 내 기분이 어떤지, 한국은 어떤 곳인지 궁금해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가 진짜 궁금해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안녕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한다. 나의 안녕을 살피기 위해서 그는 나를 진정시켜야 했을 테고, 그래서 내게 말을 걸고 있던 터였다. 그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하며 마음이 한층 진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내 얘기를 들어줄 누군가’이다. 영아들에게는 ‘대상영속성’의 개념이 없다. 대상영속성이란 외부의 사람이나 물체가 시야에서 벗어나 있어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아기의 눈 앞에서 딸랑이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가 뒤로 감추면 아기는 딸랑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대상영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아기에만 접어들어도 이 대상연속성의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므로 아이들은 감춘 딸랑이를 찾기 위해 얼른 어른의 뒤를 살핀다.
아기들은 그래서 그렇게 미친 듯 우는 것 같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고 목청이 터져라 우니까 말이다. 눈에 보이던 엄마가 갑자기 방을 나갔을 때 아기는 생각할 것이다.
‘엄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목이 쉴 때까지 울며 힘없는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를 갈구한다. 내 곁에 있어줄 사람. 내 옆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얼마 전 우리나라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교수의 영상을 찾아보다가 그의 한마디가 내 귀를 때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쇄 살인범 같은 흉악범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들의 곁에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한 사람’이 없다는 거였어요.”
이것은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이다. 내 얘기를 진정으로 들어줄 사람이 이 지구 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래서 나의 슬픔, 아픔, 위기, 멘붕 등의 총체적 고통이 그저 나의 것인 채로 내게만 남는다는 것은. 그렇게 내가 내게 남긴 생채기가 서서히 나를 괴물로 만들고야 만다는 것은. 괴물이 된 자는(권일용 교수는 연쇄 살인범을 향해 그 ‘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아마 그 ‘사람’이라 표현하기에는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고 그 ‘새끼’라고 하기엔 방송에 적절치 않다 판단한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업신 여길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주변의 모든 것들을 파괴시키면서도 일말의 죄책이 없다.
치과에서 치아의 본을 뜨느라 기약 없이 입을 다물고만 있어야 했을 때도, 교통사고 후 온몸이 결박된 채 응급실에 실려가 혼자 남겨졌을 때도 나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역시 나는 내 얘길 들어줄 누군가를 간절히 불렀다.
“응응응응!!!(간호사님!- 입에 본 뜨는 물체를 물고 있었으므로)” 또는 “Excuse me!!!”
지금 당장 내 눈 앞에는 안 보여도 저 너머 어딘가에서 내 얘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면 희망이 있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 안의 굳게 닫힌 문, 그 앞에 선 것과 같은 것이 인생이다. 거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들리는 소리. 누군가, 그 한 사람의 목소리만 있어도 곁의 생명은 시들지 않는다. 나도, 나도 어떤 이에게 반드시 그 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극적으로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문 너머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두르고 서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구원의 손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