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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Nov 05. 2020

2군으로 사는 법

이도저도 아닌 채로 행복하게

외국인으로서 살다보니 마이너리거들의 주눅들은 표정과 그늘과 어두움이 내 것처럼 낯익다. 나의 어두움의 원인 중 하나는 분명 언어의 장벽일 것이다. 나는 이 단단하고 높은 장벽에 부딪칠 때마다, ‘왜 여기 이러고 살지’ 한탄하곤 한다.


미국 생활 햇수로 12년 차에 접어들었다. 김치 없이도 밥을 먹고 미국음식이 체질에 잘 맞다. 그러니까 아주 부적응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언어는 다르다. 지난 세월 암만 생존 영어에 단련이 되었다 해도 말 그대로 그것은 ‘살기 위한 것’이지 거기에는 1%의 은유도, 상징도, 리듬도 없다. 내가 앞으로 영어를 더 잘하게 된다면 이는 다분히 나의 의사를 조금 더 분명히 피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나에게 '영어'란 오로지 의사소통의 도구로,  문학과의 연결고리는 거의 없다.


소설가 김영하가 ‘해외 집필’ 활동에 대해 말하면서 “작가의 뇌는 들고 다니기 어렵지 않지만, 그 뇌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모국어로 짜여 있다. 작가는 모국어에 묶인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나의 조국은 모국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내 뇌는 물리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에 놓여있으나 그렇다고 영어가 술술 나오도록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모국어는 끊임없는 박해를(?) 받고 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모국어가 활동하기 좋은 곳에 뇌를 두어야 마땅하다. 굳이 외국을 글감으로 해야 하는게 아니라면 말이다. 이것은 글 못쓰는 나의 변辯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국 책 몇 권을 주문했다. 안 읽은 책들이 책장에 많이 꽂혀있지만 오래전에 쓰인 책이거나 누가 주고 간 책들 뿐이다. 요즘 스타일의 표지를 입은 젊은 작가들의 책을 읽고 싶었다. 모국어로 쓰인. 마침내 책들이 배달됐을 때 나는 나의 조국을 받아본 마냥 뭉클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평생 읽고 쓰다 죽으려고 한다. 그런데 환경은 영 받쳐주지를 않는다. 한국 책 귀한 것은 말해 뭐하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온갖 종류의 알림들(물론 영어로 쓰인), 연락들에 읽고 답해야 한다. 한글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한글로의 모드 전환이 잦아질수록 나의 언어 구사력은 발전하기는커녕 퇴보하는 기분이다. 우리말도, 영어도 그 어떤 언어도 완벽히 구사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죽을 때까지 읽고 쓰겠다 다짐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환경은 불행일 뿐이다. 교보문고에 가서 모래알 같은 모국어에 둘러 싸여 신선한 표현과 다양한 어휘를 탐구하고, 단어 채집을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한다. 그래도 모자랄 판에 남의 나라에서 글을 쓴다고.


영어나 한국어 어느 하나 제대로 놀릴 줄 모르는 나. 거기에 보태 나라는 인간은 어쩌면 이렇게 줄곧 어정쩡한가 생각한다. 일류대학 출신도 아니고, 글 쓰며 먹고살던 이력도 변변치가 않다. 미국에 살지만 주류 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보기 힘들고,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이 대단한 히트를 치고 있지도 않다. 쓰는 말이 그런 것처럼 삶도 그런 것이다. 니맛도 내 맛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채로.


그러면 어쩌자는 거냐고 내가 내게 묻는다. 영어를 모국어만큼 구사할 수 있으면 달라지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다 그만두고 한국으로 가 살면 되겠냐고. 끝내주는 미모와 학벌과 돈과 명예를 가진다면, 나를 대변하는 분명한 수식어가 있으면, 그러면 되겠냐고.


인생이란 답을 얻어가는 과정인 동시에 답 없이 살아가기엔 야속하리만치 짧은 것이다. 영원한 이방인, 마이너리티, 이도 저도 아닌 서른아홉의 아줌마는 대체 어디에 과녁을 두고 활시위를 당겨야 할까.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해 아래는 영원한 만족도, 완전한 일류도, 완벽한 주류도 없다. 슬프지만 그렇다. 주류 사회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포기하고 마는 것을 본다. 누가봐도 어정쩡한데 다 가진 사람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애초에 ‘1군’, ‘인싸', ‘주류’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 문제일지 모르겠다. 막상 올랐을 때, 가졌을 때, 들어갔을 때의 허무함을 우리 모두는 잘 안다. 한낱 신기루 같은 것에 전 생애를 바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하고 쓸쓸하다.


그저 신이 내게 허락하신 탤런트를 하루하루 차곡차곡 발휘하며 살면, 그래서 기쁘고 행복하다면 그뿐이 아닌가 싶다. 악착같이 1군에 오르려고가 아니라 그저 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 벅차고 떨리다면 그뿐이 아닌가. 게다가 막영어도 모자라 막한글로 휘갈기는 글임에도 조회수가 올라가고 좋아요가 눌린다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 아닌가. 나는 비록 2군이더라도 아니, 내가 1군인지 2군인지 조차 의식할 필요 없이 읽고, 쓰고, 읽고, 쓰는 데서 기쁨을 누리겠다. 한마디로 정신승리하겠다는 건데, 사족蛇足이 많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렇다. 대부분은 정신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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