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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G Sep 10. 2020

서른아홉의 여행-코로나 시대의 여행(3)

2. 이런 것도 낭만이라면


고민 끝에 아카디아 국립공원(Acadia National Park)을 방문하기로 했다. 공원까지의 거리는 우리가 머무는 곳에서 차로 3시간 정도였다. 국립공원 주변에는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하루 전 날이라 어떤 곳은 자리가 없었고 어떤 곳은 가격이 너무 비쌌다. 부랴부랴 아이들을 재우고 토끼눈이 되도록 주변지역의 사정을 알아보았다. 많은 관광객들이 뱅거(Bangor)라는 지역으로 숙소를 잡는다고 했다. 뱅거에서 아카디아까지는 1시간이 걸린다. 여기서부터 뱅거까지는 2시간이니까 숙소에서 짐을 풀고, 점심으로 컵라면을 먹고 나서 아카디아로 향하면 되겠구나. 아이들에게는 장거리 이동이 쉽지 않을 터,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적당한 호텔에 예약을 마쳤다.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여행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번갯불이 콩 볶아 먹는 여행도 나쁘지 않다. 여행이 하루가 연장이 됐으니 일상으로의 복귀도 하루 더 미뤄졌다.


늦어도 아침 9시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잤다. 그래 봐야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는 사람은 역시 나뿐이다. 아침 여덟 시, 남자 셋을 깨우고 1층에서 간단한 아침을 가져와 먹은 뒤 짐을 싸고 프런트에서 체크 아웃을 했다.


차에 타서 새로운 숙소 주소를 찍었다. 지금 시각 오전 9시 10분. 딱 좋아. 로맨틱. 성공적. 기분 좋게 출바알~을 외치려는데 갑자기 남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카드!”

“뭐?”

“내 카드, 내 카드가 없어졌어. 어딨지? 어딨어?”


지갑을 열어보던 남편이 이제사 *데빗카드(debit card)가 꽂혀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직불카드. 한국의 체크카드 같은 것


“어제 한국 음식점에서 결제하고 카드 어쨌어?”

“어쩌긴 뭘 어째? 자기 카드 자기가 챙겨야지!”

“니가 결제한다고 가져갔잖아!”

“나는 서버한테 카드를 줬지. 그리고 안 받았어? 아니 근데 왜 내 핑계를 대고 난리야?”

“니가 냈으니까 니가 챙겨야지!”

“내가 카드 주고 다시 받아서 오빠 지갑에까지 친절히 끼워줘야 하냐?”


애써 서둘렀는데, 이게 뭐야? 아이씨, 어쩔 거야? &@#%^*$£!! 급 냉랭해진 우리는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며 말싸움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하고 나서 카드를 돌려받은 기억이 없다. 어제 손님이 많아 허둥대던 그 남자 서버가 카드 돌려주는 것을 깜빡한 게 분명했다.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찾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식당 오픈 시간을 확인했다. 그마저도 인증샷 찍는다고 가게 간판을 찍어뒀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 머리로 상호를 기억할 리 없었다. 가게는 오전 11시 30분에나 연다고 되어 있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설사 카드가 거기 있더라도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 픽업해 가기엔 버려야 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남편도 그즈음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일단 숙소로 가자. 가서 통화가 되면 카드가 거기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면 내일 내려가는 길에 픽업하면 돼. 없으면 정지시키면 그만이지뭐.”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를 듣고 나니 나도 쓸데없이 감정 소비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싸우면 답도 없다. 애들이라도 없으면 네가 잘했다, 내가 잘했다 잘잘못 정도는 가려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연애 중이라면 싸우다 누구 하나 차에서 내려야 끝이 나겠지만. 우리는 결혼 11년  차, 앞뒤 사정 분간이 노련한 베테랑들 아닌가. 나는 능글스러운 아줌마답게 모드를 변경하고 밝은 표정을 장착했다.

 

“그래, 뭐 그럼 되겠네. 그럼 빨리 출발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며 뱅거를 향해 달렸다.


3. 반나절 만에 돌아본 좌충우돌 아카디아(Acadia National Park)


이번에도 호텔 프런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안전 준수사항에 관한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다. 지난번 호텔에서도 메인주에서 허락하는 5개 주에서 온 여행자가 맞는지, 아니라면 사업 차 방문한 것인지, 아니면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에서 음성을 받았는지 등의 여부를 묻는 서류에 체크하고 사인까지 해야 했다. 사인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이 어려웠다. 사인하는 행위를 통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확인하고 인증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미국 내의 여행도 현재로서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가능한 상황이다. 그 어떤 것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나라 미국에서,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날이 올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런 상태가 얼마나 더 오래갈지 아무도 모른다. 미국 각지에 퍼진 친구들과 통화하며, ‘격리 풀리면 꼭 한 번 갈게.’라고 약속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호텔방에 올라와 컵라면을 먹었다. 여행지에서 먹는 컵라면은 언제나 진리이다. 아이들도 국물까지 후루룩 올킬. 간단한 짐을 챙겨 서둘러 아카디아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감사하게도 어제 다녀온 레스토랑과 연락이 닿았다. 그쪽에서는 안 그래도 카드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언제 찾으러 올 거냐고 물었다. 내일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에 포틀랜드에 들러 카드를 받고 근처에서 점심 먹고 출발하면 될 것 같았다. 약속 시간을 잡고 나니 왠지 뿌듯했다. 남편과 괜히 길게 싸우지 않아 다행이었다. 카드가 아니었다면 가질 수 없었을 포틀랜드에서의 점심시간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아카디아로 들어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여기저기에서 침엽수들이 보였다.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다리 근처 트랜튼(Trenton)이라는 지역에는 랍스터 식당이 많다고 했다. 남편이 전날 밤 미리 공부한 대로 저녁은 나오는 길에 트랜튼에서 랍스터를 먹기로 했다. 눈으로 재빨리 저녁에 갈 식당을 찍어놓고 아카디아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미국 산 지 올해로 11년. 그런데도 국립공원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갑자기 펼쳐진 엄청난 자연경관 앞에서 약간은 얼떨떨했다. 욕심은 났지만 짧은 시간 안에 돌아봐야 했기 때문에 하이킹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저 남편이 급하게 짠 동선을 따라 차로 한 바퀴 휙 도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동반한 여행자들에게는 차로 둘러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첫 번째 코스는 ‘바 하버(Bar Harbor)’라고 했다. 나는 바 하버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따라갔다.


바 하버의 경관은 솔직히 말해 약간 실망이었다. 포틀랜드 다운타운의 아름다운 항구를 먼저 구경하고 온 터라 더 그랬다. 만약에 아카디아에서만 며칠을 지냈다면 정박해 있는 배들을 신기하게 구경하고 항구 특유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에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포틀랜드를 구경하고 온 우리에게 그곳은 시간을 두고 구경하기에 딱히 매력적인 점도 없었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많아 복잡했다. 나는 우리 집 독재자답게 이동을 명령했다. “여긴 별로다. 이동합시다. 다음은 어디?”


그리하여 다음으로 들른 곳이 샌드 비치(Sand Beach).여기서 아이들을 좀 풀어놓아야 했다. 아카디아의 장점 중 하나는 바다와 산, 호수를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공원에 들어서면서부터 보이는 크고 작은 호수에 감탄하다 보면 돌산이, 그리고 바다가 나온다. 샌드 비치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다행히도 찻길 한쪽에 주차할 수 있다는 사인이 있어 비탈길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비치를 향해 걸어갔다.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 산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는데 거짓말처럼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은 차가웠지만 물은 몹시 맑았다. 모래놀이라도 하라고 급하게 아이들에게 수영복을 입혔다. 발을 담가보니 얼음물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물에 몸을 푹 담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긴팔 옷이 필요할 정도였으니까. 아이들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비눗방울 놀이, 파도 넘기, 모래성 쌓기 등을 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우리는 시간이 정지된 듯 조용히 자연을 감상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큰아들이 울먹이며 내게로 달려 왔다.


“엄마, 너무 추운데 몸이…”


세상에! 손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차가운 물과 차가운 바람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그런 모양이었다. 10년 넘게 한랭 두드러기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나는 덜컥 무서웠다. 가라앉지 않으면 어쩌지, 온몸이 부어 기도라도 막히면? 약국에서 알레르기 약이라도 사 먹여야 했다. 우리는 서둘러 차로 향했다.


엄청난 크기의 국립공원을 반나절의 일정으로 와서 아이의 몸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경험하면 나 아니라도 누구나(?) 여행을 그만두자고 제안할 것이다. 잔뜩 겁이난 나는 그만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며칠을 구경해도 다 돌아보기 모자란데 애들을 데리고 무리한 여행을 감행하다니. 갑자기 나 자신도, 남편도 원망스러웠다. 남편은 어딘가로 계속 차를 몰고 있었고 나는 잔소리를 해댔다.


“여기는 보니까 하루에 올 곳이 아니네, 며칠 묵으면서 찬찬히 이 쪽 길로, 다음 날은 저쪽 길로 등산도 하고 그래야지. 이거는 뭐야 속성으로, 애도 아프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대도 남편은 끄떡없이 어딘가로 향했다. 아이는 핑계고,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 볼멘소리를 한다 생각하는게 분명했다.다행히 아이의 붓기는 조금씩 가라 앉고 있었다. 나의 멘탈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을 즈음 이번에는 GPS가 말을 듣지 않았다. 산속이라 전파를 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동네에서도 네비 없이는 길을 잃는 여자.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우리 올라가는 거야? 내려가는 거야? 약국 찾아가는 거야? 우리 어디 가는 거냐고??!!


아마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며 남편은 속으로 웃었을 것 같다. 그는 원래 목적대로 캐딜락 마운틴(Cadillac Mountain)을 향해 계속 올라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아아악! 무서워! 여기, 여기, 절벽이야!!”


남편은 산꼭대기를 향해 계속 차를 몰았고 내가 앉은 조수석 옆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보였다. 절벽 아래에는 시퍼런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비행기를 탈 적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발명품이 바로 비행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쓰고 보니 정말 진상이다. 남편에게 같이 여행 가고 싶지 않은 사람 1위를 뽑으라면 나를 꼽을 게 확실하다.)   


“돌아가더라도 캐딜락은 갔다가 가야지. 우리는 지금 캐딜락 마운틴을 향하고 있어. 거기 정말 멋지대.”


남편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아들 핑계라도 대려고 급하게 뒤를 돌아봤는데 멀쩡해진 아들은 절벽 아래를 바라보며 “와우!”를 연발하고 있었다. 천연덕스럽게 초코파이까지 까먹으며. 이제 나는 운전자대 잡은 사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더 보고 싶지만, 하도 난리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산 꼭대기는 갔다 가야지. 조금만 참아.”

한 손은 안전벨트를, 한 손은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나를 향해 남편이 말했다. 이 길에 정말 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한참 후에 차가 멈추었다. 눈을 떠보니 주차장이었다. 휴우, 드디어 도착했구나. 등줄기에 땀이 나고 어지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내렸다.

와아~! 캐딜락 정상에서는 감탄사만 빼고 모두 말을 아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아카디아 국립공원의 자연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구름이 바로 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깊이 파인 바위의 굴곡과, 바위 사이사이에 굴하지 않고 우뚝 솟은 뾰족한 나무들. 다채로운 빛깔의 화강암과, 바다인지 하늘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푸른 반짝임을 바라다보며 나는 감동하기에 바빴다. 이 얼마만인가 산 정상에 오른 것이. 한국을 떠나와 7년간 평지뿐인 미시간에 살면서 가끔은 산이 그립기도 했다.  

산 아래서 올려다보면 그야말로 산은 너무 높고도 뾰족하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막상 올라보면 그다지 가파르지 않다는걸 알게 된다. 게다가 뾰족하기만 해 보이는 산 정상에도 발 디딜 만큼의 평지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이여! 인생에서 마주하는 높은 산들 앞에 두려워말라!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우직하게 걸어 올라라! 정말 멋진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다. 웃기고 앉았네, 차 타고 올라온 주제에. 그것도 올라오는 내내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으면서.


벌벌 떨며 올라왔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바로 아카디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한눈에 국립공원의 매력적인 면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캐딜락은 우리 같이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아카디아 여행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필수로 들러야 할 곳이다. 차 안에서 찔끔 보이는 그깟 절벽이 무서워 이 멋진 풍경을 놓칠 뻔했다니. 나에게 꿀밤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 정상의 한쪽에 사진을 찍기 위해 줄지어 선 사람들이 보였다. 절벽 뒤로 가려진 평지가 있었지만 앞에서 보면 알 수 없는, 그야말로 sns용 사진 찍기에 딱 좋은 핫 스폿(hot spot)이었다. 사람들은 두 손으로 절벽에 매달린 듯 겁에 질린 표정을 짓거나, 아슬아슬하게 서서 금방이라도 뒤로 떨어질 듯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그걸 보며 금세 나는 또 생각에 잠겼다. 인생도 이와 같아서 언뜻 봤을 땐 절벽 같지만, 사실은 그 뒤로 안전한 평지가 펼쳐져 있을 때가 많지 않나. 절벽 같은 인생, 마치 뒤에 평지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즐기면서 살면 어떨까. 그저 저렇게 익살맞게 행복하게!


또 다시 나만의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아이들과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산이다. 어지간히 신기하고 재미있겠지. 이제 보니 나보다 아들 둘이 더 씩씩했다.


긴장을 많이해서인지 급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남자들을 호출했다.


아이들은 다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벌써가냐고 툴툴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 하고 하산하자. 오늘은 이런저런 사건이 많았으나 랍스터가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거야. 돌아가는 길 트랜튼에 들러 랍스터 먹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았다.






이제 한 편 더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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